재계가 말이 없다.

기업분할및 투자회수명령제등 대기업그룹의 이해관계가 걸린 새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정부구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나 재계의 반응은
침묵뿐이다.

대기업그룹 관계자들이 입을 다물고있는것은 물론이고 전경연도 일절
논평이 없다.

지난달 27일 정부의 신경제 5개년계획과 관련,재계입장을 정리하기위해
열린 전경련기조실장회의는 3시간이나 계속됐으나 "정리"된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참석자들이 시종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조규하 전경련상근부회장은 회의가 끝난후 기자들과 만나 "신경제계획과
정부사정에 대한 대기업그룹의 의견을 끌어내려했으나 발언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회의경과를 설명했다.

역시 같은 목적으로 지난달 29일 열렸던 전경련 상의등
경제5단체상근부회장 간담회도 "신경제5개년계획에 대한 민간기업의 의견을
경제단체 공동으로 작성,정부에 건의키로했다"는 "결론아닌 결론"만
내놨을뿐 새제도등 현안에 대한 재계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않은채 끝났다.

재계가 이처럼 신경제에 대한 의견개진을 극도로 자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제 금융 재정등 경제제도 전반을 개혁하겠다는 신경제계획의 기본방향에
재계가 그만큼 공감하고 있다는게 그 이유중 하나일수도 있다.

새정부출범이후 정부와 경제계가 "우리경제가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는데
시각을 같이하고 있는데다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행정규제완화등 각종
경제활성화조치가 발표되면서 재계가 정부정책에 지지를 보내고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정부의 사정등에 따른 "분위기"가 재계의 목소리를
움츠러들게 하고있는 것도 부인하기 어려울것 같다.

물론 아직까지는 기업체에 대한 본격적인 사정은 없었다. 그러나
대선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귀포열차사고로 남정우사장이 구속된
삼성,역시 건설공사수주로 구자원럭키개발부회장이 구속된 럭키는 물론
대우 선경 한국화약 동부등 상당수의 대기업그룹들이 그나름대로의
"사연"을 갖고 몸조심을 하고있는 상황이라는게 재계관계자들 스스로의
분석이다.

정부가 당장 재계에 대해 사정에 나서는등 직격탄을 쏘지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터놓고 밝힐 입장이 아니라는게 이들의 현실인식인
셈이다.

그렇다고 대기업그룹의 위상과 산업개편방향등 재계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게될 신경제계획에 대해 함구만 하고 있을수 없는게 재계가 안고있는
고충인 것이다.

사실 재계는 신경제정책의 "총론"에는 공감하면서도 공정거래질서개혁등
"각론"에 들어가면 상당한 불만을 갖고있다. 이는 재계관계자들이
사석이든 공석이든 단편적으로 던지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신경제계획이 발표된 직후 조석래 효성그룹회장은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장 자격으로 기자들과 만나 "대기업의 소유분산을
촉진하기위해 금융기관이 대규모기업집단의 주식보유를 확대하는것은
정부가 금융기관을 지배하고있는 현실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조심스럽게 반대의 뜻을 비쳤다.

또 공정거래위원회 주최로 29일 열린 정책협의회에서 "비효율적인 재벌은
규제해야하지만 효율적인 대기업은 규제를 풀어줘야한다"(조전경련부회장)
"소유.경영분리는 국제경쟁력에 얼마나 도움이 될것인가에 관한 충분한
검토가 있은후 정책방향이 결정돼야한다"(배종열삼성그룹비서실전무)
"출자한도 제한과 같이 무차별적으로 대기업을 규제하기 보다는 산업정책
측면에서 업종및 기업별 미시적 규제가 바람직하다"(손병두동서경제연구소
장)등 신경제정책에 반대의 뜻을 담은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전경련이 "신경제 정책을 확정짓는 과정에서 실물경제의 흐름을 알고있는
민간 경제계의 참여를 확대해 달라"고 끈질기게 주장하는것도 각론의
일부분에 대한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이달말까지 경제계.학계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친후 재계의 입장을
담은 정책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할 계획이다. 과거와는 달리 즉각적인
반대의사 개진을 자제하고 정부와 최대한 마찰을 줄여가며 보다 신중하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겠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