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길사에서 나온 "임화 신문학사"(임규찬 한진일 공편)는 그동안
영인본의 형태로 떠돌던 "개설 신문학사"를 중심으로
"조선신문학사서설""소설문학의 20년"등 문학사와 관련된 임화의 원저작을
현대적으로 개정,보완한 책이다.

80년대 6공화국 당시 납.월북작가작품의 공식출판이 허용되면서 임화는
그의 "이식문학론"과 함께 근대문학사의 발전과정에서 넘어야할 큰 체계로
다시 인정받아왔다.

90년엔 임화의 일제말 친일행위를 둘러싸고 김윤식 김용직씨등
서울대국문학과 두교수 사이의 의견대립이 있기도 했다. 당시
김윤식교수는 저서 "임화연구"를 통해 임의 친일이 "문학론과 세계관의
변화에 따른 사상적 전환이었다"는 논지를 편 반면 김용직교수는
문예지기고를 통해 "생존을 위한 위장전향이었다"는 주장을 한 바있다.

91년엔 "이식문학론"을 둘러싼 논쟁이 일었다. 김윤식교수등은 임화의
"이식문학론"은 "조선의 자주적 발전가능성을 부정하고 일본과의 병합을
합리화했다"고 혹독히 비판했고 이에 반해 평론가 신승엽씨는 당시 "창작과
비평"가을호 기고문을 통해 "이식문학론은 변증법적 사관으로 본 거시적
이론으로 재평가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사상과 무관히 임화가 문학사 기술및 방법론 방면에서
한국근대문학사의 선구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은 80년대이후 국내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임화는 26년 "매일신보"에 시 "무얼찾니"를 발표해 등단했다. 26년
카프에 가입,28년 중앙위원이 됐다. 29년 카프시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네
거리의 순이""우리 오빠와 화로"등을 발표했다. 32년 24세의 나이로
카프서기장이 돼 35년 카프해산까지 이 단체를 이끌었다. 35년
"조선신문학사서설"을 발표했고 첫시집인 "현해탄"(38년)평론집"비평의
논리"(40년)를 내놓았으며 39년 조선일보에 "개설신문학사"를 두달간 43회
연재하기도 했다.

광복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이끌며 활동하다 47년 월북했다. 53년 7월
북에서 미제스파이혐의로 체포돼 8월6일 처형됐다.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비극적 문학인,그것이 45년간 살다간 임화의 남은 모습이다.

편집에 참여한 임규찬씨(성균관대강사)는 지금까지의 임화연구가
"이식문학론"에 국한돼 성급히 종결됐다며 대부분의 연구가 여전히 그의
이식문학론을 넘어설만한 방법론적 모색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임화 신문학사"가 그가 그려놓은 한국근대문학사설계도의 가치를
되짚어보는 토대가 됐으면 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