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장 한명이 또 사퇴했다. 박기진제일은행장의 전격퇴진은 지난달 중순
사정한파가 금융계를 강타하면서 김준협 이병선전행장이 물러난지 1개월도
채안된 상황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금융계는 말그대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날 박행장의 퇴진은 일반의 예상보다 빨랐다. 그는 동생인 경진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학산산업개발에 거액을 불법대출했다는 혐의가 제기돼
은행감독원이 특검에 착수하자마자 곧바도 옷을 벗었다. "검사가 끝난
다음에 사퇴할수도 있으나 은행결속과 직원의 사기를 고려해서 하루빨리
물러나야한다고 생각했다"는게 사퇴의 변.

혐의 내용이 확인되기도전에 그가 사표를 낸것은 검찰과 은감원의 조사가
예사롭지않게 비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도덕적인 차원에서 더이상
버티기 어려웠으리라는 것도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박행장을 물러나게만든 학산산업개발은 매출액
1천2백11억원(92년)으로 국내공사도급순위 88위. 지난 57년 국제공영으로
출발,동우건설 학산종합건설등으로 상호를 바꾼 토건및 주택건설업체다.

건설업계는 박행장의 동생인 경진씨가 지난 85년 취임하면서 포항중심의
정계실력자와 교분을 맺어 급성장,경북지방의 관급시설공사및 민간공사를
맡아왔다고 평한다.

이회사는 89년7월 포항시에 지하3층 지상20층규모의
오피스텔(학산타워)2백6가구분을 지었으나 절반밖에 분양이 안돼 자금난에
몰렸다. 이에따라 이 회사와 거래해온 은행들이 여신을 줄이고 형이
행장인 제일은행에 의존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이회사에 대한 제일은행의 대출이 불법인가. 학산의 여신은
은행권만 1천31억원 단자권은 1백억원정도다. 이중 제일은행여신이 절반을
넘는 5백70억원(대출 4백14억원,지급보증 1백56억원)이다.

제일은행은 학산측이 제공한 미확정채권을 담보로 여신을 제공했다고
한다. 미확정채권이란 건설회사가 공사발주처로부터 받는 대금의
청구권이다.

대부분 건설회사들은 이를 담보로 넣고 은행돈을 빌린다.
미확정채권자체는 별문제가 없으나 제일은행의 경우 발주처가 학산산업개발
자체인데다 담보평가도 과다하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있다. 은감원의
검사결과가 나와봐야겠지만 이과정이 비정상이었다는 설이 많다.

다만 박행장이 지난 91년2월22일 행장으로 취임한후 시중은행중
순익기준으로 중위였던 제일은행을 91,92년 연속 1위로 끌어올릴만큼
경영능력이 탁월했다는 점에서 비정상대출을 했다는게 이해가 안된다는
시각도 많다. 박행장은 특히 은감원등에서 특정기업에 대출토록
청탁할때도 시중은행장중 가장 비협조적일 정도로 업무처리가
철두철미했다는 얘기도 듣고있다.

그런 인물이 비록 동생이 경영하는 회사라고해서 정실대출을 했다는게
수긍이 안된다는 시각이 많다.

금융계는 이런 점에서 박행장에 대한조사와 퇴진의 이면에 6공의
실세정치인이었던 이원조의원과의 두터운 관계가 깔려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경북 영덕태생인 그는 영남대학교로 합쳐진 대구대학교 출신으로
이의원보다 1년앞선 55년5월 제일은행에 들어갔다. 이의원이
제일은행상무로 은행생활을 마감하고 은행감독원장을 거쳐 6공의 힘있는
정치인으로 통할때 행장까지 승진,그의 탁월한 능력 유무와는 상관없이
"이의원사람"으로 분류됐었다.

새정부출범으로 이의원의 날개가 떨어지는듯한 상황에서 박행장이 옷을
벗게되자 양자의 침몰을 오비이락격으로만 볼수없다는게 금융계의
시각이다. 전체적으론 TK(대구.경북)퇴조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

이번 박행장의 퇴진으로 금융계는 초죽음상태다. 김준협 이병선전행장의
퇴진으로 가시는듯했던 사정강풍이 급기야 박행장을 밀어내자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분위기다. 대부분의 임직원들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며
도대체 "사정의 끝은 어딘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털어놓고있다.

이미 이회창감사원장이 국책은행 임직원 1백14명을 대출비위혐의등으로
조사하고있다고 밝혀 언제 또다른 희생자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모국책은행장과 주요지점장들에 대해서도 조사가 진행중이라는 단서들이
잡히고있어 박행장의 퇴진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우려도 높다.

금융계는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있다"며 문제인물을 털어내고 정상을
되찾도록 하루빨리 사정활동을 마감하길 바랄뿐이다.

<고광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