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은행지점장의 자살사건이 지난 한주일내내 신문 방송과 사람들 입에
시끄럽게 오르내렸다. 얼마쯤 윤곽이 드러나긴 했지만 아직도 사건의
정확한 내용과 핵심은 베일에 가려져있다.

그가 유용한 자금규모가 과연 정확하게 얼마인지,떠도는 소문대로
1천억원도 넘는건지 모를 뿐아니라 그가 그런 엄청난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으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진짜 동기는 무엇이고 또 그는 정말로
자살을 한것인지등 의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의문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속시원히 흑백이
가려지지 않은채 유야무야 묻혀버리고 말듯이 영구히 풀리지 않을 위험이
많다. 경찰이 이미 사건자체를 자살로 단정해서 종결해버렸다고 했고
은행감독원과 재무부는 또 은행내규를 고쳐 문제의 CD(양도성예금증서)를
앞으로는 은행창구에서만 거래할수 있게하고 조폐공사에게 CD용지의 인쇄와
공급을 전담케 하겠다는 등의 사후약방문격 수습대책을 내놓느라 정신이
없는걸 보면 짐작할만 하다.

물론 사건전말이 먼저 소상하게 한점의 의혹없이 가려지는게 중요하다.
그래야 재발을 방지하고 개선 개혁을 도모할수가 있다. 비슷한
사건,똑같은 사건.사고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것은 그때마다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려버린 때문이다.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갖가지 짐작을
한다. 비록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몰라도 그런 사건이 일어날수 밖에
없었던 현실적 상황적 배경에 관해서만은 모든 국민이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우리 사회현실을 개탄한다. 그 점을 정부와 당국이
똑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진상규명이고 재발방지고 제대로
될리가 없다.

이번 사건은 결코 어느 한 자연인이 어쩌다 잘못해서 저지른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병리현상의 한 단면이 노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출세와 개인적 영달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는
풍조,또 그렇게 해서 목표를 달성한다든지 일단 높은 자리에 오르기만하면
지난날의 잘못된 수단과 방법이 모두 정당화되거나 불문에 묻혀져버리고
마는 관행이 문제다. 땀흘려 번 돈과 힘안들이고 번 돈의 구분이 없어지고
사회전체가 돈의 크고 작은 단위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한게 문제이고
매사를 적당히 처리하면서 살아가는 일에 개인 가정 회사 정부기관등 모든
공사조직이 아무 거리낌없이 익숙해져 있는것이 문제다.

가치관이 상실되고 전도되어있다. 그런 속에서 온갖 비리와 부정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고 배신과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이번일에 정치자금이 관련됐다는 추측까지 나도는 풍토이니 이지점장사건도
결국 이런 사회를 온상으로 해서 배양되고 끝내는 터진 것일 뿐이라고
해야한다. 쉬쉬해서 묻어버린 금융사고가 결코 적지 않을 터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저질러지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진 무엇보다 중요한 메시지는
유가증권조차 믿을수 없게된 우리 사회의 완벽한 신뢰상실현상 바로
그것이다. 은행은 신용대신 담보와 보증이 있어야만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는 관행과 제도를 고집해왔지만 그래도 은행자신은 고객으로부터
신용을 인정받아왔고 사람들은 그것을 공신력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젠 그 공신력마저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일반사람들은 그런게 있는지 조차 잘 몰랐던 CD는 지난 84년6월부터
등장한 우리 금융시장에서 무시못할 유가증권의 일종이다. 현금화폐도
유가증권에 속한다고 말할수는 있다. 그러나 대개는 주식과
공.사채,문제의 CD와 수표 환어음 약속어음,그리고 선하증권과같이 유가물
혹은 재산권을 증권화하여 유통이전할수 있게 만든 것을 가리킨다. CD는
지난 61년 미국의 FNCB(퍼스트 내셔널시티뱅크)가 처음으로 고안
발행하면서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단돈 천원짜리 지폐나 5백원짜리 동전에서 가짜가 나돌아도 이만저만
법석을 떠는데 수억원짜리 가짜CD가 나돌고있고 진짜가 수백억원어치나
불법 변칙적으로 발행 유통되는 바람에 진짜 CD마저도 믿을수 없게 된 것은
그야말로 이만저만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CD뿐아니라 모든
유가증권,그리고 금융기관 신용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신용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매개"가 뿌리채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유가증권을 못믿고
은행을 믿고 거래할수 없게된다면 그건 끝장이다.

대선정국속에 너도나도 국가를 걱정하고 경제를 살리겠다고 소리높이
외쳐대고 있지만 믿을수 있는 세상,상식과 원칙과 순리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게 곧 정치이고 경제임을 철저하게 깨닫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