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님이 정화수를 올려놓고 부귀영화를 우리가문에 오게 해달라고
두손모아 기도하시는 것을 어렸을 적에 여러번 보고 들은적이 있다.
착하신 할머님이 하시는 일이라 오늘날까지 부귀영화라는 어휘에 큰
거부감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요사이 돌아가는 세정을 보고 있노라면 부귀영화의 참뜻이
무엇인지 묻고 싶고 또 따지고 싶다. 한 어휘의 뜻도 사회의 변천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며 또 새롭게 새겨져야만 한다고 생각해 본다.

이조사회의 병리현상은 돈이 생기면 양반을 사고 또 양반이 되면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정경유착의 뿌리가 확산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부와 귀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지는 과정에서 사회적 병리현상은
깊어지기만했던 것같다. 이런 점에서는 중국의 역사도 우리와 비슷했으나
일본의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 사와 상이 혼합되지 않았으며 또 결탁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상은 부의 축적으로 거상이 되고 나아가 세계적
기업으로,또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제일을 지향해왔다. 한편 사는 아무리
가난해도 품위유지가 첫째이지 상을 괴롭히면서 부를 탐내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차이가 19세기 말엽에 일본에서는 근대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성공하였고 한국과 중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레비(Levy)교수의 지적이
기억에 새로워진다.

우리는 지금 고도산업사회에 진입하느냐 아니냐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있다. 고도산업사회는 분업의 바탕에서만 발전한다고 생각하면서 부와
귀,그리고 영화를 분리하는 사회의 관습을 우리국민이 정착시켜야만
하겠다. 부는 부의 축적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선진기술을 도입하는
훌륭한 일을 하기에 남보다 좋은 차나 주택은 물론 여러가지 물질적 사치를
국민은 관용해야 한다. 귀는 공익을 챙기는 높으신 분이기에 우리는
존경해야만 한다. 따라서 귀인은 가난하더라도 존경받도록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영화는 부와 귀는 없지만 자기 일에 충실한 보통사람에 주어져야
한다. 불신과 질시대신에 상호신뢰와 상호존경하는 사회풍조는 이러한
부와 귀,그리고 영화의 분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