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내가 목동아파트로 이사간 그해 겨울 어느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저녁무렵이었다. 언젠가 "참나무는 내게 숯이 되라네"라는 시집으로 나를
즐겁게 했던 김영재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가 박범신과 함께 있는데
무조건 나오라는 것이었다. 두툼한 오리털 파카에 몸을 싸고 나는 눈을
맞으며 그들이 기다린다는 한강변의 레스토랑으로 나갔다. 난로가
따뜻하게 피어 있는 안온한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김시인과
박작가는 수인사가 끝나자 내게 말했다. 가까이 사는 우리 또래 작가
시인들끼리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어떤 모임을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내가 도착하기전 이미 두 사람 사이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간듯 그 개략의 윤곽을 제시했다.

굳이 정기적으로 날짜를 못박아 두지말고 회원들에게 경조사가 있을때나
또는 만나고 싶을때 서로 연락하여 만나 정담이나 나누자는 것이었다.

나는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끙끙거리며
작업을 하는 천래적인 외로움을 타고난 작가라는 직업은 서로의 살을 부빌
다정한 이웃을 언제나 필요로하는 것이다. 내가 동의를 하자 곧
목동아파트에 거주하는 젊은 문인들을 대상으로 회원인선 작업에 들어갔다.

소설을 쓰는 이광복 정건영 이상문씨등이 선선히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고,그리고 나중에 이사를 온 시인 황청원씨와 시와 문학 평론을
함께 하는 박덕규도 또한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또 박건한 시인이 새로
회원이 되었고 사진을 하는 고창수씨가 옵서버로 참가하여 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고는 했다.

그렇게 하여 목양회가 탄생되었는데 모임의 명칭은 우리들이 사는
목동아파트가 양천구에 있는 연유로 그 첫글자를 따서 적당히 배열한
것이었다.

우리 목양회는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작가들을 중심으로 중편집을
한권 발간하여 그 인세를 비축해두고 경비에 충당했고 회원들이 작품집을
발간할때면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고 기념품을 만들어 증정하고는 해왔다.
그리고 별다른 까닭없이 만나고 싶을때면 수시로 서로 연락하여 자리를
함께 하고는 했다. 89년 여름에 무주구천동으로 나들이를 갔던 일이 특히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요즘 서로들 하는 일이 바쁘다 보니 한동안 만남이 뜸했다. 그러나
다가오는 겨울에는 좀더 자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올 겨울에는
추워지리라는 보도가 있었으니 필경 눈이 많이 내릴것이고 그렇듯 눈이
내리는 날 저녁이면 누군가 회원중의 한사람이 불현듯 회원들을 소집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회원들은 쉽게 거기에 응할것이고
술을 들며 정담을 나누는 자리가 자연스럽게 자주 마련되지 않을까
여겨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