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전이던가. 권투팬사이에 "비틀비틀 15회전"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다.

당시 인기가절정이었던 프로복싱계에 이아무개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크지도 않은 체격에 맷집이 좋아 아무리 어려운 상대를 만나도 KO를 당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초반부터 비틀대기 시작해 "이제 몇회를 못넘기겠구나"하고 혀를 끌끌
찰라치면 어느새 기운이 되살아나 힘차게 주먹을 내뻗고 "이제
회복됐나보다"하고 기대를 걸라치면 이내 다시 비틀대기를 마지막
15회전까지 계속하는 특이한 스타일의 선수였다. 그래서 그의 시합은
승패를 떠나 또다른 재미를 선사했고 그에게는 많은 팬들이 붙어다녔다.

우리정치의 과거와 현재를 관심깊게 들여다보면 바로 이 "비틀비틀
15회전"이라는 말이 그렇게 잘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광복후 반세기 가까이 우리의 정치는 어느 한날 평안해본적 없이
비틀대기만 했다. 그 많은 정치적 사건에다 여야간의 극한적 대립은 물론
적과 동지를 가릴수조차 없는,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이 한시도 잘날 없었던
것이 우리의 정치풍토였다.

그런가운데서도 이만큼 경제발전이 이룩되고 민주사회가 커왔다는 것은
우리경제가 어느정도 정치에 면역이 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절대권력자가 신임하던 부하의 손에 죽는 셰익스피어의 사극에나 나옴직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포함해 그 많은 충격으로 비틀대면서도 도중에서
KO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 것은 우리 정치와 경제의 끈질긴
"15회전체질"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우리의 증권시장은 지나치게 정치판의 눈치를 살피는데 급급한
모습이다. 주가를 결정하는 요인이 정치상황 밖에 없는양 "YS장세"
"노심장세" "탈당장세"등의 신조어가 한동안 유행하더니 근자에는
박태준의원의 신당불참선언에 따른 "TJ장세"가 1주일동안 시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주말에는 김우중씨의 정치참여보도가 나돌면서
"TJ장세"를 단숨에 뒤엎어버리고 말았다.

증권업자나 투자자나 모두 그날그날의 정치권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하루살히 삶을 살고있는 느낌이다.

주가가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모두 정치권에 대해 울화를 터뜨린다.
정치판만 조용하면 주가가 한없이 올라갈것처럼 말이다.

어느 증권계인사는 "요즘은 그래도 핑계라도 댈 데가 있어서 편하다"고
자조한다. 손해를 본 투자자들이 거칠게 항의하면 정치인 욕만하면
그런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선거후가 더 걱정이라고
덧붙인다. 그때가서는 핑계거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정치권의 쌈박질이 증시를 망쳐놓고 있다는 일반적인 믿음은 냉정히
따져보면 다소 과장됐다고도 할수 있다.

정치판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본시 화합보다는 대립과 시끄러움을
생리로 하는 곳이다. 그곳은 도를 닦는 고요한 절간도 아니요 입을 모아
절대자를 찬양하는 예배당도 아니다.

정치판에서 때로 큰 소리가 터져나오고 크고 작은 소동이 벌어진다고 해서
당장 나라가 두동강나거나 우리살림이 거덜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치중독자라고할수 있다.

우리증시사상 최대호황기였던 80년대말은 어디 정치가 안정돼 투자자들이
재미를 봤던가. 여소야대의 구도아래서 청문회다,"물정부"다 하며
한풀이정국이 지속됐지 않았던가. 오죽해야 3당이 합치면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겠는가. 그래도 주가는 오르기만 했다.

요즘들어 정치판이 좀 어지럽게 돌아가자 경제계에서는 입을 모아 정치가
경제를 망쳐놓았다고 한탄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규모는 이제 몇몇 정치인이 좌지우지할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경제정책팀장에 누가 앉든 그것이
우리경제의 결정적 변수가 될수는 없다. 만고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끄떡없이 버텨온 것이 우리경제다. 누가 뭐래도 우리경제는 제갈길을 가게
돼있다.

그날그날의 정계기상도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주식투자자들의 의식구조가
문제라면 더 큰 문제이다. 증시를 회복시키는 것은 길게 보아 인위적
부양책도 정치지도력도 아니다.

투자자들이 우리경제에 대해 믿음을 회복하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처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