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 플리트 장군이 갔다.

한국전때 유엔군사령관이었다는 단순한 그런 은인으로서 뿐만아니라 역대
유엔군사령관및 주한미8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남달리 한국에 애정을 지녔던
분이기에 그의 타계소식에 성큼 40년전의 믿음직스럽던 그 모습이 되살아
떠오르는 것이리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언제나 철모를 눌러쓰고 있던 전형적인 무골인 그의
부리부리한 왕방울 두눈을 잊지 못한다. 건장한 체구에도 왠지 둥그스름한
얼굴에 언제나 정이 넘쳐흐르는듯 했다.

제임스 어워드 밴 플리트.

1915년 미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었다. 특히 제2차 대전때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그
유명한 발지전투를 사단장으로 직접 지휘,용맹을 떨쳤다.

한국전쟁에서는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인해전술로 무지막지하게 덮쳐드는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되몰아내 한국전쟁의 전환점을 이룩했다.

1953년 대장으로 퇴역한후 미대통령 특사로 극동지역을 순방했고,그후
한미재단총재로 일하면서 전쟁으로 폐허가된 한국재건에 힘썼다. "한국
사랑"의 그의 정성은 갖가지 문화사업도 추진했으며 제주도 목장건설에까지
신경썼었다.

1962년5월 밴 플리트는 "5.16"이후에도 한국을 도우려,GM 다우케미컬
스탠더드오일 웨스팅하우스 포드자동차 하노버신탁등 세계굴지의 실업계
중진 38명으로 구성된 미경제사절단장으로 내한했던 것이다. <본지
92년8.월일자 특집연재 "산업전략군단사" 제5회 참조>
밴 플리트장군-그는 한국전에서 공군조종사로 함께 참전했던 외아들을
잃고 말았던것. 그 단장의 쓰라림마저 서리었으니 그 어찌 한국을 잊을수
있겠는가.

그후 그는 팔순이 되던 72년에 오랜만에 방한,당시 한국의 발전상에
너무도 감격해 주위사람들 가슴을 찡하게 했었다. 장군은 6.25때부터
스스로 "한국은 나의 집"이라고 깊은 애정으로 불러 왔던것.

100세를 꼭 채우고 잠자다 고요히유명을 달리 했으니 와석종신이라
여한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90년대의 "나의 집"을 다시 한번 못보고 눈감은
것이 못내 아쉬웠으리라.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잠들면 아마도 꿈을
꾸겠지."
고히 잠드소서,밴 플리트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