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6월24일 새벽4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일제히 대소련공격을
개시,동부유럽을 불바다로 휩쓸어 넣었다.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전역은 이미 나치 독일의 대소공격을 위한
보급창구실로 전락되었었다.

독.소 전쟁이 개전되자 세르비아지역(유고의 동남부)의 한 산록에서 나치
독일로 부터의 조국해방을 위한 소규모의 민족회의가 열렸다.

헌칠한 체격의 게릴라 지도자 티토가 이들을 리드했다.

회의는 즉각 게릴라부대의 창설을 결의했고,민족해방전선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9월초에는 그 세력이 5만명에 이르렀다.

티토의 부대는 독일군의 작전 전선과 철도 트럭의 행진을 차단했다.
패전을 모르는 나치군이 유고의 산악게릴라에게 발이 묶인 상태였다.

티토부대는 철의 군율로 다스려졌다. 독.이의 파시스트군에 대한
저항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나 유고의 민중으로 부터 단 한알의
양식이라도 약탈하는 경우 극형에 처한다는 엄명이 있었다.
1942년 봄 티토부대가 소도시 코니치시를 나치군으로부터 탈환하는 전투는
유별나게 힘겨운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두명의 사병이 굶주림에 못견뎌
한여인의 집에 들어가 식량을 강탈했다. 여인이 티토에게 직소함으로써 이
사실이 드러났다. 이 두사병은 그들의 잘못을 자백,즉각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날밤 그중의 한 사병이 전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긴다든지,손을 떨면서 총을 쏜다든지 하는것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이튿날 이른아침 두사병은 전우들의 눈물젖은 시선을 받으며
형의 집행을 받았다.

티토부대는 독일의 패망과 함께 승리했고 전쟁중에 받은 소련
스탈린수상으로부터의 냉대에도 뒷날 "독자노선"의 전개로 충분히 앙갚음을
했다. 티토가 한때 제3세계의 큰 별 노릇을 한 이유도 그의 게릴라 부대가
지녀온 유고인민에 대한 사랑의 결실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티토의 아우들이 지금 이웃살육에 여념이 없다.

민족해방의 성지처럼 사랑을 받아온 베오그라드와 사라예보가 피바다로
변해가고 있다. 작은 연방안에 도사리고 있던 소민족주의자들의 적의가
티토의 영광을 깡그리 짓밟아 버린셈. 소민족들간의 휴전협정이 화해의
실마리를 찾기만 고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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