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가 아름다운건 센강이나 에펠탑 때문만이 아니다. 박물관이 많고
도시 전체가 이끼 슨 역사와 문화의 향기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위해 숨쉬는 과거의 유산들 앞에 누구나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독일
튀빙겐시의 교외엔 "베벤하우젠"이란 시골마을이 있다. 여기엔 "헬더린
박물관"이 있다. 이고장이 낳은 시인의 연구자료가 가득 담겨있는
박물관은 비록 작고 허름하지만 온 시민의 자랑거리가 아닐수 없다.
이탈리아의 볼로냐시도 존경의 대상이다. 꼭 유럽최고의 대학이 있대서가
아니라 소도시 전체가 그윽한 역사문화의 향기를 내뿜기 때문이다. 서울이
대도시로 성장한 것은 다행이지만,놀자판 먹거리판을 빼고선 과연 어디가서
문화의 향내를 맡을수 있을까. 그러나 찾아보면 그런곳이 없는것도
아니다. 다만 무관심이 문제일 뿐이다. 영등포 네거리. 전철 2호선
당산역에 내려서면 곧바로 삼성출판박물관이 눈에 띈다. 지난10일 오후
그곳에선 "한국신문학 특별기획전"이 막을 올렸다 (11월30일까지).
근대화의 정신유산인 신문학이 싹을 틔운지 백주년을 맞는 뜻깊은 행사로서
지난해 "교과서 특별전"에 이은 기획전이다. 시집이 1,800권,소설이
1,500권,산문집 700권에 전집 450권등 자그마치 4,500권 가까운 값지고
해묵은 도서들이 "1세기의 향기"를 풍긴다. 최초의 신소설로 알려진
이인직의 "은세계"와 "혈의 루"등을 비롯해서 육당 춘원 만해 안서
소월등의 책과 육필들이 즐비하게 선을 보인다.

가만히 살펴보면 옛것일수록 "못생긴 책들"이다. 오히려 그것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홍명희가 만해에게 써보낸 편지는 금방 먼지를 풀썩
일으킬것만 같다.

이것들을 한자리에 모은것도 어렵거니와 보존과 양식의 들판에 내놓은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재만조선인시집은 유민의 저항과 울분이 알알이
박혀있어 금방 피가 묻어날것만 같았다.

안팎으로 돈만 벌면 그뿐인 출판계의 타락상을 개탄해온 우리로서는 이런
신선한 기획전이 알찬 문화유산으로 이어질것을 믿는다. 영화
"쿼바디스"로 유명한 생케비치의 단편 "등대지기"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모국어에대한 향수가 새삼 가슴을 치미는 때문일까. 우리에게도
베벤하우젠시민 이상의 자랑거리가 늘 꼬리를 물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