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정부가 전후 47년만에 종군위안부 동원사실을 인정, 공식사죄 의사
를 밝힌 가운데 그동안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15일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회장 김종대)에 따르면 종군위안부로
동원됐던 김학순씨(68.서울 종로구 충신동)등 3명이 지난해 12월6일 1인당
일화 2천만엔씩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대일소송을 제기한 이후 지금까지
4명이 유족회사무실에 찾아 와 자신들도 종군위안부로 동원됐었다고
신고를 했으며 또다른 1명은 14일 유족회에 전화를 걸어와 증언의사를
밝혔다.
이에따라 해방이후 자신이 종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공개 또는
비공개적으로 밝 힌 사람은 지난해 일본에서 사망한 배봉기씨 등
해외거주자 2명,국내 8명 등 모두10 명으로 늘어났으며 김씨 등 일부
위안부출신 여성들의 공개증언과 대일소송에 힘입 어 앞으로
피해당사자들의 신고 및 증언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대일소송이후 새로 나타난 피해자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필리핀,대만에 종 군위안부로 끌려갔던 사람들로 대부분 " 관리들이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한 말에 속아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들 가운데 서울에 살고 있는 황모씨(호적나이 65세)는 인터뷰를 통해
18살때 인 1943년 가정형편이 어려워 함흥에서 식모살이를 하던중 주인집
딸 대신에 방직공 장 정신대로 동원됐다가 그후 중국 길림성의 일본군
부대에 투입돼 부대가 전선을 따라 이동하는대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다.
황씨는 "일본군인들은 부대가 이동하게 되면 많을 때는 20여명, 적게는
5-6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야전 텐트나 민가,학교 등에
몰아넣고 성욕을 처리했다"고 말하고 " 전투가 벌어져 군인들이
최전선으로 떠나는 날이면 으레 몸 상대를 해야했다"면서 치를 떨었다.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만주를 탈출, 두 달간을 꼬박 걸어서
서울에 도 착했었다는 황씨는 "주인집 딸대신에 방직공장에 간 것이 평생
결혼도 하지 못하는 한많은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또 12살때 동네어귀에서 소꿉장난을 하던중 이른바 ''처녀
공출자''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대만까지 가게됐었다는
이옥분씨(66.부산거주)도 당시 일본군은 학교,사찰, 민간주택 등을 징발해
보통 한 곳에 20-30명가량의 종군위안부를 몰아 넣고 혹사시 켰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매주 한차례씩 군의관들이 위안부들을 집합시켜 놓고
''606호''라는 이름 의 성병예방주사를 놔주었으며 일단 위안부들이 성병에
걸리면 사람취급도 못받아 진주출신의 ''에이코''라는 여자는 병에 걸리는
바람에 독방에 갇혀 매일같이 얻어맞 다 결국 죽었다"고 말했다.
대만남쪽 항구인 고웅시 인근의 군부대 위안소에 있었다는 이씨는 또
국민학교 를 징발,모두 13개의 교실에 다다미를 깔아 설치한
임시위안소에는 당시 38명의 조 선인 위안부들이 있었으며 한 여자가 10-
20명의 군인들을 연달아 상대하다 지치면 다른 여자와 교대한 후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생활이 계속됐었다고 폭로 했다.
''하루코''라는 일본이름으로 불렸다는 이씨는 "토요일 같은 때는
학교정문 멀리 서부터 많게는 2백-3백명의 군인들이 교실앞까지 군표를
들고 줄을 서곤 했으며 당 시 이같은 임시위안소만 부대 주변에 13군데나
있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