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소위 성전에 투입된 일본군인들의
성욕처리를 위한 도구로 전선으로 끌고간 조선인
종군위안부는 도대체 몇 명 이고 생존자들은 얼마나 될까.
얼마전까지만해도 일본측이 존재 사실조차 부정할 만큼 역사속에서
실종됐었던 종군위안부는 흔히 적게는 8만-10만명에서 많게는 20만명이
한반도에서 동원된 것으 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일본군부가 군인 29명당 1명의 위안부를 책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태평 양전쟁 당시 일본군 관계자들 사이에서 통용됐던
''니구이치''라는 말을 근거로 위안 부 동원규모를 거꾸로 추산한 것일 뿐
구체적인 수자 파악은 일본정부의 함구와 자 료인멸로 접근조차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종군위안부로 동원됐다가 병사,학살등으로 숨진 희생자 수는
더더욱 베일 에 가려져 있으며 귀환한 생존자들마저 예외없이 수치와
저주로 얼룩진 과거를 숨기 고 자취를 감춰버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본의 위안부 동원 실상은 전후 4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철저하게
은닉돼왔다.
일제당시 야마구치(산구)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으로 일하면서
조선땅에 직접 건너와 이른바 위안부 사냥을 진두지휘했다고 스스로
폭로한 요시다 세이지씨(길전 청치)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은 전쟁에
패하자 내무차관의 극비긴급명령서를 각 지방 관서에 하달,특고경찰을
중심으로 정신대 또는 위안부 관련 문서를 소각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추정수자 8만-20만명속에 일본의 군수공장에 끌려간
이른바 여자근로정신대가 포함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수자가 말 그대로
군부대로 동원된 위 안부들만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한일 양국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 형편이 다.
또 8만-20만명 중에는 일본인,대만인도 포함돼있고 이 중 8할이
조선인들이었다 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 역시 열쇠를 쥐고 있는 일본
당국의 함구로 위안부 동원진상에 대한 억측만 증폭시키고 있을 뿐 극히
제한된 증언을 토대로 한 추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다만 위안부 희생 규모에 대해서는 지난 75년 당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회장 강위종씨가 강제징용,징병실태 조사차
일본후생성을 방문했을 때 관계자료를 통해 위안부 사망자가 9만명이라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으나 강씨가 88년 작고하면서 자 료가 유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원실태=조선인 종군위안부 동원은 1937년 중일전쟁발발로 전선이
확대되면 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일본군부는 시베리아 출병을 계기로 군인들 사이에 성병이
만연하면서 군 의 사기가 급속히 떨어지자 성병 우려가 없는 조선여자들을
위안부로 동원하기로 결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인들에 대한 위안부 또는 매춘 강요는 이미 1920년대 일본
북해도로 끌려갔던 조선여성들이 윤락강요에 못이겨 투신자살했다는
''자살절벽''이 하꼬다테( 함관)에 남아있는 예가 보여주듯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이전인 한일합방직후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정신대 동원은 공식적으로는 일본후생성이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표,시행 한 44년8월23일 이후이며 이 법령에 따르면 12-40세 미만의
배우자없는 여성이 동원 대상으로 ''정신근로령서''를 발급해 군수공장등지로
동원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강제연행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일제는 이같은
법적근거를 마련 하기 훨씬 전부터 관알선,모집등의 허울 아래 지역단위로
인원을 할당,민간업자들을 앞세워 대부분 ''좋은 직장으로 보내주겠다''고
속여 여자들을 위안부로 송출한 것으 로 드러나 있다.
특히 일본은 전쟁말기로 접어들면서 이같은 동원형식마저 팽개치고
아예 노골적 으로 처녀사냥에 나서 심지어 트럭을 대놓은 채 논밭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들을 그 대로 연행하는등(요시다씨증언) 마치 마소처럼
사람들을 ''징발''하는 만행을 저질렀 다.
또 근로정신대로 방직공장,군수공장등에 동원됐던 사람중 일부는 다시
전선위안 부로 차출돼 나가기도 했다.
<>위안부 참상=위안부들이 주로 끌려간 곳은
남양군도,동남아시아,중국대륙,대 만등.
뿐만 아니라 일본내에도 마쓰시로대본영등 군부대 주변 곳곳에
위안소가 설치돼 조선여자들이 혹사당하는등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예외없이 위안부가 동원됐다.
그 한 예로 일본 동경근교의 가시와(백)시 한 복판에는
조선인위안부들을 수용 했던 위안소 건물이 아직 남아 있기도 하다.
위안부들은 중국대륙의 전장에 동원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예수송선 이라고 불리던 관부연락선으로 일단 시모노세키로 보내져
거기서 각 전선으로 배치 됐다.
남방전선에 끌려갔던 군인,군속 생존자들에 따르면 이들 위안부들은
미군의 폭 격을 피해 대개의 경우 일본해군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비밀리에 전선으로 보내졌 으며 그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또는 어뢰에
맞아 수송선이 침몰,몰사한 경우도 있었다.
또 성병에 걸려 ''쓸모''가 없어지면 죽임을 당하는등 이른바
전쟁소모품으로 처 리됐으며 남양군도등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군이
항복하기전 강요에 의해 ''옥쇄''하거 나 증거를 인멸하려는 일본군에 의해
집단학살당하기도 했다는 게 위안부 피해 당사 자들의 증언이다.
이들은 또 부대가 전선을 따라 이동하게 되면 수요에 따라 재배치된 후
전장을 오가며 ''정액받이''로 쓰였으며 남서태평양의 라바울섬에서는 44년
12월 해군소속으 로 있던 위안부 2백여명이 미군 폭격을 피해 다른 섬으로
잠수함을 이용,이동하던중 어뢰에 맞아 몰사했다(당시 해군군속 시라이
가쓰도씨 증언,가시와시 거주).
<>귀환=종군위안부들은 일본군의 패전과 함께 연합군에 의해
오키나와,하와이 포로수용소등에 수용돼있다가 귀환조치되거나
군인,군속등으로 동원된 징병자들과 함께 해방후 46년초 사이에 귀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