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이래 2년여 봇물이 터진듯 통일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어 온다.
30년 가까운 통제의 굴레가 한꺼번에 벗겨진 끝의 자연스러운 강력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백인백출의 엇갈린 의견을 가다듬어 마음과 힘을 한 방향으로
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속에서 계속 허우적거리다간 역사의 주체가 주저앉고 만다.
나라밖으로 눈길을 돌릴때 지구위 곳곳에서 전개되는 여러 민족들의
미래를 향한 자기향상의 용틀임이 시야에 들어온다.
고르바초프의 소련, 바웬사영도의 폴란드, 공산당 1당독재를 사실상
허물어 버린 헝가리등등 실로 놀라운 천안문광장 유혈로 일막의 장은
내린듯해도 긴눈으로 보아 12억 중국의 갈길도 그 예외는 아니리라 본다.
그들 모두가 더이상 이데올로기의 포로로 남기를 거부하고 인간다은 삶,
보다 풍요한 삶을 공통으로 희구하고 있음이다.
나아가 일본이 패전의 잿더미위에서 일어서 오늘날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게 된 힘, 막강 미국이 일등국의 지위를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하는
이면의 결여는 또한 무엇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경제력이다.
저 독일을 보라.
외세에 의해 동강이 난 양독간의 40여년에 걸친 경쟁끝에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곳은 동/서 어느쪽인가 묻는다면 그 자체가 우문이다.
올림픽마다 금메달을 휩쓸었다고 해서 동독이 서독을 압도하고 국민이
더욱 행복하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서로의 탈출에 성공한 수천 수만명 동독인들이 흘리는 환희의 눈물이상
명쾌한 대답은 없다.
그 힘이 어디에 근원하는지를 우리는 양심에서 대답해야 한다.
두말할것 없이 약동하는 경제가 힘의 원천이다.
서독이건 일본이건 대만이건 이데올로기만 먹으면 살것처럼 이념투쟁에
영일이 없었다면 힘의 원천은 피폐했을 것이다.
주의주장에 눈이 벌건 오늘의 제3세계, 어제까지의 제2세계 공산권처럼
말이다.
인생 본연에서 우러나오는 창의와 개성을 바탕으로, 생사의 투쟁이 아니라
재기의 기회가 보장되는 경쟁의 원리아래 솟구치는 힘을 경제역량함양에
평화적으로 이용한 나라와 국민은 행복의 욕구를 충족시킬수 있었다.
사필귀정, 사람의 물결은 철조망밖으로 자유와 기회를 찾아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40여년동안 오매불망 그리던 조국땅을 처음 밟은 사할린동포의 한서린
환희의 절규를 며칠전 화면에서 보고 또 보면서 함께 눈물짓지 않은
시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한을 그나마 어루만져 줄수 있게끔 만든 진정한 힘이
무엇인가를 아마도 곰공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이만큼이라도 커진 우리의 경제역량이 절대적 배경이다.
공산권 사람들이 서울올림픽에 와서 고유문화의 향기, 시민의 친절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것은 무대위의 효과음이상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상품의 홍수와 거리의 생동감에 이끌린 것이 분명하다.
인간욕구의 근본은 크게 생리적인 것과 자기존중내지 자아실현으로
구분된다.
소유의 욕구는 생리욕구중에서 기본이다.
어린애가 태어나서 배우는 낱말은 "엄마" 다음엔 "내꺼"다.
공산이데올로기의 최대약점은 바로 이 인간생래의 욕구를 외면하는데에
있다.
본능적인 욕망을 억제하는데서 두가지 문제가 파생한다.
하나는 열심히 일하려 들지 않아 분배할 생산이 모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능의 소생을 항시 감시 억압하기 위하여 엄격한 내부통제와
무기생산이 제도화 하는 것이다.
결국 풍족하게 쓰고 자유롭게 살려는 인간의 본질적 희구와는 정반대의
주의주장이 다름아닌 공산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에대해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자연 자체, 타고난 그 자체이다.
우리가 공산주의에 이긴다는 것은 바로 인간본연에의 충실을 뜻한다.
그러려면 물질적 욕구를 충족할 경제력의 함양, 더 구체적으로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생산력의 증진이 긴요하고,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유의 보장이 필수적이다.
경제의 힘은 어떻게 해서 함양되는가.
공정한 경쟁의 보장이다.
기업간의 자유경쟁이 보장되어야만 생산은 극대화하고, 소비자의 이익에
대한 봉사 역시 수요공급의 원리아래서만 긴 줄을 서지 않고 가능하다.
수요있는 곳에 공급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같은 경제적 자유와 경쟁원리의 보장에 있어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전제조건이 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개인과 개인, 기업과 기업간 또는 그 대각선간의 경쟁이 국가권력과
기타의 힘에 의해 제한되거나 또 경쟁이 공정한 규율을 무시한 무한적
투쟁, 생사 갈림의 투쟁이 되어서는 안된다.
생산도 사회풍토도 증진되고 순화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이데올로기도, 우익독재도 생산증강과 복지증진이라는
인류사회의 목표구현에는 모두 적합하지 않다.
무산자의 복지균점을 공산사회만이 실현해 낼수 있다고 설파한 마르크스-
레닌의 사상은 공산당 선언후 141년, 러시아혁명 72년만에 무위로
증명되었다.
동구 헝가리 집권 공산당이 엊그제 스스로의 해체라는 최초의 기록을
선언하고 만 것이다.
우익독재의 해독 또한 크다.
집권층과 재산가의 야합은 부패와 핍박을 낳고 결국 공산사상의 씨를
다시 잉태시키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시장실패의 교훈들을 깡그리 잊지는 않는다.
고전적 자본주의예찬에 경도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독점자본주의의 폐단은 사전에 방지되어야 옳으며 헌법에 보장된
복지균점권리는 공권력에 의하여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원칙과 예외간에 자리가 뒤바뀌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의
관점이다.
우리는 1960년대초 1인당 GNP 80달러선으로부터 30년미만사이에 4,000
달러선으로 올라섰다.
실로 큰 발전이다.
그러나 성장에 바빠 간과한 부문이 적지 않음을 안다.
그리고 그 결함은 이제라도 보완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성취가 만족할 수준에는 어림도 없이 못미친다.
한해 끝난 추수처럼 이것만 갈라먹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보다 성장하여 우리의 경제력과 거기서 우러나는 복지/자유의 내음이
한반도에 풍기고 흘러 넘칠때 북의 동포들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품에
안길 날은 기필코 도래한다.
그러는 사이에 대내적으로 통일된 국론아래 대화와 물적 인적교류를
한단계 한단계씩 진행시켜 나아가면 평화속의 국토통일, 민족재통일의
날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다가오리라고 확신한다.
60년대초에 이땅에 태어나 우리의 경제성장사와 함께 자라온 한국경제신문은
오늘 창간 25주를 맞아 새로운 각오로 경제력의 함양과 경쟁원리의 활착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탤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