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10여년동안 피의
투쟁을 벌였던 프랑스혁명이 오늘로 200주년을 맞는다.
1789년 7월14일 분노한 파리의 군중들이 정치범수용소인 바스티유감옥을
습격, 구체제의 상징이던 바스티유감옥이 시민군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프랑스혁명의 횃불이 올랐다.
프랑스혁명은 처음부터 자유/평등/박애를 내세웠다.
이 표어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정치/사회철학으로서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체제의 기본으로 되어 있다.
프랑스혁명은 정치적으로는 전제적인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시민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혁명직후인 8월에 채택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자유시민의
불가상의 권리들을 담은 것으로서 그후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자유/평등/박애라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그 엄청났던 공포와
폭력과 파괴, 그리고 인명피해는 치를만한 대가였던가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시작되고 나서 혁명에 수반된 폭력과 인명의 피해는 어쩔수
없는 혁명의 논리에 따라 진행될 것이었다.
혁명의 물줄기는 한번 과격하게 흐르면 그 논리에 따라 흐를뿐 아무도
그 방향을 전환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혁명은 혁명이 성공하면 정치적 변혁으로 만족하는 보수파와 이를
사회적 변혁으로 확대시키려는 과격파로 분열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이어지게 되는데 프랑스혁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의 과격파는 내일 등장하는 과격파에 의해 온건파가 되어 숙청되어갔던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반혁명분자들의 능률적인 처단을 위해 기요틴이라는
단두기계를 발명케했고 그것으로 수만명의 목을 잘랐다.
반동분자가 아닌 사람들이 뚜렷한 이유없이 학살당하는 공포정치가 연출,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 평등이라는 이름아래 평등이 짓밟혔다.
그리하여 프랑스혁명은 결국 1799년 나폴레옹의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 중 략 ..........
프랑스혁명은 그당시 순조롭게 진행되던 프랑스산업의 발전과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았고 오히려 영국이 19세기 세계경제의 주역이 되게했다.
오늘날 우리의 경제침체 사회불안은 일본과 대만의 발전을 가속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조선업예서의 경우가 이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긴눈으로 본 국가발전과 국민경제의 번영은 조용하고 확고한 개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우고 익힐때다.
폭력이나 힘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일수가 없다.
경제성장과 분배배정의 실현을 위한 국민적 노력이 결집된다면 혁명아닌
점진적 개혁이 가능하다.
그길을 모색해야 한다.
자유를 상실함이 없이 어떻게 고루 잘사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느냐를
우리 모두 생각하고 풀어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