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녀의 얼굴을 모른다.
얼마 전 서울 합정동에서 운영하던 재즈카페를 정리했다. 2020년 초겨울, 코로나 펜데믹 속에 (뜬금없이) 문을 열었지만 적지 않은 재즈밴드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손님들에게는 관람료를 받지 않았고 뮤지션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니 ‘남간디’라는 별명을 얻었다. 두어 번 유료공연을 했지만 수익금은 한국재즈협회에 기부했다. 그렇게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실천하고 보니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나마 소유할 게 남았을 때 슬그머니 양평 전원생활로 복귀했다.

재즈카페의 마지막 날, 함께 일했던 아르바이트생 아이가 사장님과 사진 한 장 찍고 싶다 해서 둘이 한 컷을 남겼다. 사진 속의 그 아이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7개월 쯤 출근했는데 한 번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같이 간식을 먹을 때 잠깐 마스크를 내렸던 적은 있지만 실내가 어둡기도 해서 생김새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작은 얼굴에 눈이 동그랗고 아기자기한 이목구비였다. 친절하고 일도 잘해서 나에게 아주 고마운 아이로 남아있다.

코로나가 끝난 건지 이제는 마스크를 벗고 관공서도 드나들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벗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레깅스만 입고 당차게 활보하던 동네 꼬마도 계속 얼굴을 가리고 산다. 아직은 조심하는 분위기가 있기도 하지만, 습관이 되다보니 훌러덩 벗는 게 어색한 사람도 있는 듯하다. 나 역시 그렇다. 외출할만한 상태가 영 아닐 때는 얼굴을 가려버리면 속이 편하다.

재즈 노래 중에 ‘The Masquerade Is Over’라는 게 있다. 가면무도회가 끝났다는 얘긴데, 코로나가 끝났다는 노래라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고, 연인 간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다. 이별을 앞둔 연인사이의 애틋한 심상이 가사에 배어나온다. 그래서 유감스러운 노래로 원제목은 ‘(I’m Afraid) Masquerade Is Over’다.

연애가 가면무도회라…. 연애 한번 안 해본 사람 없겠지만 나도 옛날에 그랬다. 보고 싶지 않은 척, 애타게 기다리던 전화를 받을 때도 괜히 태연한 척, 바쁜 척하고 그랬다. 헤어지자 말하면서 속으로는 붙잡아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왜 어려웠던 걸까.

그렇다고 오장육부를 다 드러내면서 사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경험상 실제 상황에서는 그런 게 별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궁금한 게 있을 때 관심이 가고 조심스러운 긴장감을 만든다. 그런 게 연애의 참 맛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형님은 결국 평생 독신으로 살고 계시지만.

어쨌든 ‘The Masquerade Is Over’는 무려 1939년에 작곡된 노래인데도 지금까지 수백 명은 부르고 연주한 스탠더드다. 스탠더드란 무엇인가. 나도 알고 옆집 아저씨도 알고 레깅스 꼬마도 어쩌면 알만한 그런 노래다. 하지만 재즈에서 스탠더드라는 게 우리 정서에 익숙지 않은 게 많아 이 곡의 제목만 가지고 멜로디가 특정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 선율적인 버전으로 백인 여가수 헬렌 메릴(Helen Merril)이 부른 것이 있다. 1956년 녹음으로 빈티지한 사운드를 배경으로 조심스레 따라가는 멜로디 라인이 손에 잡힐 것 같다. 언뜻 담담한 표정으로 들리지만 슬픔을 끌어안으려는 감정선이 긴장감 넘치게 표현된 곡이다.

한발 더 나아가 멜로디를 좀 더 리드미컬하게 해석한 버전으로 사라 본(Sarah Vaughan)의 노래가 있다. 사라 본 특유의 굵직한 헤비급 보이스도 인상적이지만, 스윙감이 풍부해졌다는 점에서 한결 진한 재즈의 맛이다.

가면 이야기로 재즈노래를 하나 더 보태보자면 ‘This Masquerade(가면무도회)’라는 것도 있다. 재즈 거장 조지 벤슨(George Benson)의 히트 넘버로 유명한 곡인데, 개인적인 애청곡은 팝가수 카펜터스(Carpenters)의 버전이다. 포크가수 리온 러셀(Leon Russel)의 바보 같은 원곡을 가져다가 이 정도로 멋진 해석을 보여주다니! 이거야말로 팝과 재즈가 절묘하게 만난 통섭의 명작이라 생각한다. 특히 중간의 피아노와 끄트머리의 플루트 솔로가 감칠맛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의 가사 한 줄, “We’re lost in a masquerade(우리는 가면무도회에서 길을 잃었어요)”

재즈카페의 마지막 날 아르바이트생 아이와 찍은 사진을 다시 꺼내본다. 추운 겨울을 보내는 동안 고장난 히터 때문에 고생을 좀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사진 속의 우리는 어색하지 않고 아주 편해 보인다. 다만 마스크가 얼굴을 다 가려서 눈만 동그랗게 보인다. 우연히 길에서라도 마주친다면 내가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런지.

**소개된 음악

1. The Masquerade is over - Helen Merrill


2. The Masquerade is over - Sarah Vaughan


3. This Masquerade - Carpen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