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없는 영화는 앙꼬 빠진 찐방과 같다. 영화음악이 있기에 우리는 영화의 반짝이는 진가를 발견하고, 그 감동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OST ‘Love Theme’를 들으면 필름이 돌아가는 장면, 스크린을 바라보던 소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함께 떠오른다. ‘Moon River’를 들으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환하게 웃던 오드리 헵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이렇듯 수많은 명작엔 영화를 빛낸 음악이 있다. 연재 기획 ‘영화음악 세계로의 초대’는 영화 속에 숨겨진 영화음악의 세계로 안내한다. 사카모토 류이치부터 한스 짐머, 존 윌리엄스, 엔리오 모리꼬네까지 영화음악 거장들의 삶과 그들의 음악을 살펴본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영화 ‘마지막 황제’(1988),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2016), ‘남한산성’(2017)….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명작들이다. 이 작품들엔 공통점이 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했다는 점이다.

이 음악들을 만든 주인공은 지난 3월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일본 출신 영화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다. 서양 이름 표기 방식의 류이치 사카모토로도 잘 알려진 그는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음악가다. 사카모토의 음악이 없었다면, 그가 손 댄 40여편 영화의 감동은 반감됐을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사카모토는 ‘Rain’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등의 음악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국내에선 사카모토의 음악 인생과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2018), ‘류이치 사카모토: 에이싱크’(2018)가 나란히 재개봉하기도 했다.

사카모토의 음악 인생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3살 때 피아노 건반을 치기 시작했다. 훗날 도쿄예술대 작곡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그의 음악의 뿌리는 클래식이지만 영역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데뷔 때부터 그랬다. 그는 1978년엔 3인조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를 결성해 클래식과 전자음악, 현대음악을 넘나드는 영역을 개척했다. YMO 활동으로 유명해지자 영화배우, 광고모델로도 활동했다.

영화음악 작곡에 나선건 1980년대부터였다. 1983년 영국의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하면서 작곡까지 맡았다. 이 영화의 테마곡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는 20년이 지나도록 큰 사랑을 받고 있으며, 사카모토를 대표하는 곡으로 꼽힌다.

‘마지막 황제’에서도 출연과 함께 음악 작곡을 함께 맡았다. 이 영화로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철도원’ ‘팜므 파탈’ 등 다양한 작품을 작곡했다.

그러면서 사카모토는 영화음악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는 다큐 ‘코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화음악을 만든다는 건 그냥 '일하라'는 주문 같은 겁니다. 음악 자체로 보면 자유가 없는 거죠. 그런 불편함이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해요. 전에 없던 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해요.”

영화음악은 다른 음악을 만들 때에 비해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 음악과 영화 줄거리, 분위기 등이 긴밀하게 연결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약과 한계는 곧 또 다른 가능성을 여는 열쇠가 된다. 사카모토는 그 한계를 활용해 영상과 음악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고, 나아가 새로운 음악 세계의 지평을 열었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큰 병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2014년 중인두암 진단을 받고 활동을 일시 중단했지만, 1년 만에 돌아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음악을 만들었다. 2020년 다시 직장암 선고를 받았지만, 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 작곡은 물론 독주회와 앨범 제작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사카모토는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2017년엔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만든 ‘남한산성’의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와 협업하기도 했다. 지난달 21일 발매된 슈가의 솔로 앨범 ‘D-DAY’의 수록곡 ‘스누즈’에 사카모토의 피아노 연주가 들어갔다. 두 사람은 지난해 9월 만나 함께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카모토의 음악은 클로드 드뷔시를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드뷔시처럼 특정 장면이나 순간, 분위기를 선율로 탁월하게 표현해서다. 드뷔시의 ‘달빛’을 들으면 달이 뜬 밤하늘과 낭만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것처럼.

사카모토의 음악을 들으면 영화를 보지 않아도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사람들이 많다. 사카모토 스스로도 드뷔시를 매우 좋아했다. 자신을 드뷔시의 환생이라 여길 정도였으며, 드뷔시가 자주 사용하던 9도 화음을 적극 활용했다.

그렇다고 사카모토가 기존 음악의 틀에 갇혔던 건 아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 여러 사람들과 소통했고, 환경 문제와 평화 문제에도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재해를 입은 사람들의 아픔을 적극 위로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코다’엔 그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침수한 피아노의 먼지를 쓸어내고 다시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재민들을 찾아가 연주회를 열었고,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를 지원하는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도 만들었다.

그는 생전에 “세상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그가 발견한 소리, 그걸로 만든 음악, 그 음악이 실린 영화가 그리운 계절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