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철학자 마사 너스바움 "보복보단 미래 만드는 데 집중해야"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1869년 펴낸 '여성의 종속'에서 남자들은 여성의 육체만을 통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여성의 자발적인 복종까지 원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여성들의 마음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실행한다고 주장했다.

세계적인 법철학자이자 미국의 대표적 지성으로 손꼽히는 마사 너스바움 시카고대 철학과 석좌교수는 성평등에 관한 한 밀이 살았던 19세기에 비해 현재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법은 "여전히 평등한 자율성이나 주체성을 부정하는 매우 완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우리 일상 문화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점에서다.

최근 번역돼 출간된 '교만의 요새'(원제: Citadels of Pride)는 성폭력과 권력남용의 관계를 분석한 너스바움의 신작이다.

저자는 모든 차별과 폭력이 남성들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랜 시간 외면하고 은폐해 온 성범죄의 밑바닥에는 가해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권력을 비호해 온 남성중심적인 법과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평등 혁명의 장애물은 남성의 교만"…신간 '교만의 요새'
저자는 여성들의 완전한 평등을 오랜 시간 깎아내리도록 부채질해 온 남성들의 '교만'에 주목한다.

교만은 습관적으로 자신이 타인들 위에 있다는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의미한다.

특히 사회의 오랜 전통은 남성에게 여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깔봐도 괜찮다는 '젠더적 교만'을 공급해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신곡'을 쓴 단테의 정의에 따르면 교만한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타인을 주체가 아닌 객체처럼 다루며, 그들의 존재를 듣지도 보지도 않는다.

오로지 '대상화'의 존재로서만 바라볼 뿐이다.

여기서 대상화란 칸트적인 표현대로 하면, 누군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령, '내가 A에게 X라는 행동을 하면, A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와 같은 도덕적 질문을 하지 않고 X라는 행동을 주저 없이 하는 것이 A에 대한 대상화다.

또한 남성들의 교만은 악의 상습적인 협력자인 탐욕, 시기, 혐오, 분노 등에 의해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강화했으며 그들의 이런 특성은 법 제도와 일상 문화에서 뿌리내렸다.

저자는 남성들이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한 여성들에게 기울어져 있는 법적 제도를 창조했고, 이를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고 말한다.

특히 미국법은 여성의 주체성을 1970년대까지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평등 혁명의 장애물은 남성의 교만"…신간 '교만의 요새'
1970년대에는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남성의 무력 사용'과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는 여성의 비동의'가 인정되어야 강간죄가 성립했다.

또한 판사와 배심원은 개인적 기준에 따라 정숙하지 않은 여성들은 강간 피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여러 여성의 노력으로 법은 일부 개선됐다.

페미니스트들은 피해 여성에게 부조리하게 적용되는 법 문화에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따라 성관계에 대해 여성이 '싫다'고 말하는 것은 교태가 아니라 명확한 비동의를 의미한다는 점이 법정에서 인정됐다.

또한 피해 여성의 성적 이력이 사건을 판결하는 데 색안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판결을 통해 명시됐다.

저자는 남녀평등을 위해서는 지속해서 법정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남성 권력의 부당한 사용, 공소시효 문제, 증거의 사용 방식, 신고 장려 등 성적 자율성과 주체성을 인정하기 위한 구체적 법적 절차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성평등 혁명의 장애물은 남성의 교만"…신간 '교만의 요새'
저자는 최근 수년간 진행된 미투 운동으로 성평등이 한 단계 도약했다고 진단한다.

다만, 일부 여성들이 주장하는 남성에 대한 '보복'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정의에 대한 요구가 정의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보복적인 감정을 발생시킬 수 있고 이것이 결국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통찰을 지금 되새겨볼 때라고 말한다.

"이 여성들은 정의와 화해의 예언자적 비전 대신 이전의 압제자들을 끌어내리는 종말론적 비전을 선호하며, 이를 정의라 내세운다.

하지만 틀렸다.

보복 감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인 우리는 시련을 회고하며 그 고통에 집착하기보다는 미래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
민음사. 박선아 옮김. 440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