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말해요, 당신과 걷고 싶다고…철원·고석정·꽃밭
여름은 어느새 긴 그림자만 남기고 총총히 떠나갔습니다. 저녁이면 제법 소슬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들녘에는 황금빛 벼가 누렇게 물들었지요. 가을의 문턱에서 화사하게 피어 있는 꽃의 낙원을 보았습니다. 강원도 철원 동송읍에 있는 고석정 꽃밭입니다. 한 송이 꽃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데 갖가지 꽃들이 시샘하며 피어 있으니 저절로 얼굴이 환해질밖에요. 가을은 꽃의 향기로 시작되는가 봅니다. 이번 주말,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듯 거닐며 낭만적인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포 사격 훈련장이 꽃밭으로…축구장 33개 넓이

꽃으로 말해요, 당신과 걷고 싶다고…철원·고석정·꽃밭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꽃이다. 넓이는 24만㎡. 축구장 33개를 합친 크기의 광활한 들판에 천일홍, 촛불맨드라미 등 형형색색의 온갖 꽃이 황홀하게 피어 있다. 고석정 꽃밭은 원래 군부대가 포 사격 훈련을 하던 곳이다. 부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유휴 부지로 남아 있던 것을 철원군이 2016년부터 꽃밭으로 조성했다. SNS에서 ‘인생 샷’ 명소로 입소문을 타며 알음알음 찾는 이가 늘었다. 2019년에는 3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철원의 명소로 거듭났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와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문화재 시굴조사 등으로 운영이 중단됐다가 지난 10일 재개장했다.

올해는 해바라기를 비롯해 가우라, 촛불맨드라미, 백일홍, 버베나, 천일홍, 코키아, 구절초, 메밀꽃, 국화, 억새, 코스모스 등 18종의 꽃이 피었다. 그린라이트, 모닝라이트 같은 억새류 식물도 자란다. 해바라기는 추석 전후까지, 나머지는 서리 내리기 전까지 피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꽃밭 주변에는 아기자기한 소품을 곳곳에 배치했다. 노란색 해바라기가 만발한 옆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연못 주변에는 그림 같은 쪽배가 떠 있다. 빨간색 공중전화 부스와 미니풍차도 설치했다. 전망대에서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여우와 어린왕자가 꽃밭을 바라본다. 꽃밭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인생 샷을 건질 수 있다. 꽃밭 주변에는 별도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아직 활짝 피지 않았지만 가을을 상징하는 코스모스도 조금씩 얼굴을 내민다. 산책로를 돌다 보면 한탄강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구간도 있다. 의자와 오두막까지 있어 산책하다 쉬어가기 좋다.

임꺽정 전설 깃든 철원9경 고석정도 볼 만

승일교
승일교
고석정 꽃밭 건너편에는 승일교가 있다. 길이 120m, 높이 35m의 승일교는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고도 불린다. 승일교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를 기준으로 좌우 다리 모양이 다르다. 다리를 놓은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승일교 공사는 1948년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에서 시작했지만 6·25전쟁으로 중단됐다. 휴전 후 남한 땅이 되자 1958년 12월 남한 정부에서 완성했다. 결과적으로 기초 공사와 교각 공사는 북한이, 상판 및 마무리 공사는 남한이 한 남북합작 다리인 셈이다.

김일성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승만이 끝냈다고 하여 이승만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한자씩 따서 승일교(承日橋)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따로 있다. 6·25전쟁 중 큰 공을 세우고 북한 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박승일 연대장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昇日橋)라고 지었다고 한다. 현재 승일교는 사람만 통행할 수 있다. 자동차는 옆에 있는 한탄대교를 이용해야 한다.

고석정 꽃밭 뒤쪽에는 고석정이 있다. 철원9경의 하나인 고석정은 원래 한탄강 중류 협곡 중간에 솟은 바위 꼭대기에 있던 정자다. 6·25전쟁 당시 불타 없어진 것을 1971년 고석바위가 보이는 건너편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다. 고석정과 한탄강이 어우러진 수려한 풍경에 반해 신라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도 들렀다고 한다. 이후에도 숱한 시인 묵객이 찾아 풍류를 즐겼다. 고석바위 밑 동굴에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이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각시탈’ ‘선덕여왕’ 등의 드라마를 비롯해 다양한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고석정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한탄강 은하수교는 한탄강 협곡을 가로지르는 길이 180m, 폭 3m의 현수교다. 다리를 건너며 보이는 풍경이 일품이다. 물길을 따라 현무암 절벽과 주상절리가 보인다. 은하수교 다리 중간은 강화유리로 돼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다리 건너 언덕에선 땅 아래로 꺼진 한탄강 협곡을 더 잘 볼 수 있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철원의 들판도 한눈에 펼쳐진다.

철원=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