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생동감…스페인의 정열 담아낸 아르헨타 '에스파냐'
이 음반의 열정적인 연주는 플라멩코 댄서의 검붉은 춤을 연상시킨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음반이다. 오디오 테스트용으로 언제나 빠지지 않는 오디오파일용 녹음이다. 모노 음반 시절부터 데카의 베스트셀러였다. 스페인의 위대한 거장 아르헨타의 경이롭고 다채로운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샤브리에의 ‘에스파냐’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스페인 기상곡’ 등 두 곡은 녹음이 거듭 발전했음에도 1950년대의 이 음반을 능가할 연주를 찾기 힘들다. 디지털 시대의 매끈함과는 사뭇 다르다. 음의 덩어리를 그대로 간직한, 투박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연주다. 열정적이면서도 아기자기한 소박함이 살아 있어 마치 스페인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느낌이다. 음반 녹음이 귀하고 하나의 예술로 대접받던 시대의 진한 에센스가 한 음 한 음에 남아 있다.

런던심포니를 지휘해 아르헨타는 커다란 팔레트로 캔버스에 화려한 색채감을 아로새긴다. 그야말로 재기로 충만한 지휘다. 묘한 슬픔이 음악 속에 스며드는 그라나도스의 ‘안달루시아’, 캐스터네츠 소리가 듣는 이를 사로잡는 모슈코프스키의 ‘스페인 춤곡 1권’ 등에서도 이베리아반도 저편의 핑크빛 섞인 붉은 노을이 손에 잡힐 듯하다.

CD에 커플링으로 수록된, 스위스 로망드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드뷔시 ‘영상’ 역시 경묘하다. 지그, 이베리아, 봄의 론도로 구성된 관현악을 위한 영상 중 2곡 이베리아의 스페인풍 정서가 구성지다. 스페인의 힘과 정열을 스페인 출신 지휘자가 구현한 최고 앨범이다.

아르헨타는 1913년 스페인왕국 칸타브리아 지방의 우르디알레스에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철도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댄스홀, 술집 등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스페인은 내전이 한창이었으나 마드리드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했기에 징병으로 끌려가는 건 면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명지휘자 카를 슈리히트에게 지휘를 배우고 내전이 끝난 뒤 스페인에 돌아왔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마드리드의 스페인국립관현악단에서 피아노와 첼레스타 등 건반악기를 담당했다. 1944년 마드리드체임버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취임하고 이듬해 10월부터는 스페인국립관현악단을 지휘하게 됐다. 1947년부터는 종신 음악감독이 됐다.

아르헨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결핵을 앓고 있었던 그는 1955년부터 1956년까지 5개월간 요양했다. 1958년 자택에서 사제 난방기를 가동시킨 상태에서 환기를 잘못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44세, 너무나 이른 나이였다. 나르시소 예페스와 녹음한 ‘아란훼스협주곡’과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등은 아르헨타의 명연으로 꼽힌다. 빈에서 브람스 교향곡 전곡 녹음도 계획됐으나 때 이른 죽음으로 무산돼 안타깝다.

류태형 < 음악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