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씨앗 창고' 번역 출간

사람이 사는 곳 중 북극점에 가장 가까운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종자저장고는 '인류 최후의 보루' 또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 불린다.

스발바르 저장고는 유엔 산하 세계작물다양성재단(GCDT)이 출연한 2억 달러(약 2천400억원)의 재원을 바탕으로 2008년 2월 기후 위기와 핵전쟁, 테러, 질병 등으로부터 지구의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산 위에 130m 터널을 뚫고 지었으며 내진설계가 돼 있다.

온도는 항상 영하 18℃로 유지된다.

이곳은 전 세계 1천750개의 종자은행에서 고유 품종의 중복 표본을 위탁받아 보관한다.

지난해 기준 100만 종 이상, 5억개가량의 종자 샘플이 보관돼 있다.

우리나라도 44종, 2만3천185개의 토종 종자를 위탁했다.

100만종·5억개 샘플 보관하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이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추진했고 저장고 운영을 총괄하는 국제자문위원회 의장인 캐리 파울러(72)는 '세계의 끝 씨앗 창고'(마농지)에서 저장고의 과거와 현재를 살피면서 종자 보존의 중요성에 관해 강조한다.

책은 첫 삽을 뜬 순간과 완공의 순간, 녹색 판유리가 반짝이는 입구와 냉각장치가 가동되는 보관실, 운영 방식과 재정 구조 등 저장고의 구석구석과 그 안팎에서 분투해온 사람들의 모습을 전한다.

저자는 얼어붙은 산속에 씨앗을 보관하는 방을 짓는다는 발상은 공상과학(SF)에 가까웠지만,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든 건 '누구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해야 한다'고 나선 사람들의 열정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저장고 부지로 영구동토층(2년 이상 평균 온도가 0도 이하인 땅)을 제안한 스발바르의 탄광 노동자, 건설 비용 900만 달러 전액을 부담한 노르웨이 정부,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일이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던 건설 현장의 스웨덴 청년 등 이야기도 전한다.

100만종·5억개 샘플 보관하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스발바르의 주 거주지인 롱위에아르뷔엔에는 2천200명이 산다.

세계 최북단 병원과 유치원, 술집 등이 있는 이곳은 북극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다.

저자는 상주 직원 없이 원격 시스템으로 관리되는 저장고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알려주는 역할은 이곳 주민들이 담당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2015년 9월 시리아 알레포에 본부를 둔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ICARDA)의 요구로 시리아 내전으로 손실된 씨앗을 대체하기 위한 목적에서 첫 종자 반출이 이뤄진 사례를 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저자는 "최초의 종자 반출은 획기적인 사건이면서 씁쓸한 순간"이라며 "보험용 위탁분을 실제로 사용하게 되는 상황은 아무도 바라지 않는다.

저장고를 애초의 건립 목적에 따라 이용하는 마지막 사례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책은 또 종자 획일화와 기후변화가 불러온 식량 위기와 생태계 위기 앞에서 농업의 토대이자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인 작물 다양성을 지켜내야 한다고 호소한다.

기온 상승과 병충해에 맞설 새 품종을 만들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종자 표본과 그 안에 함유된 유전자의 형질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덧붙인다.

허형은 옮김. 마르 테프레 사진. 176쪽. 2만5천원.
100만종·5억개 샘플 보관하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