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한경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인테그랄'
남편과 나는 고집이 세고 까다롭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세 가지 공통점이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운명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만남을 더 그럴싸한 의미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편의점 가판대에서 색다른 과자봉지를 한 번쯤 집어 보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이었다.

그의 썰렁한 농담에 내가 박수를 치며 웃게 되었을 때, 차비를 아끼려고 늘 걸어서 다니던 그가 불현듯 저녁을 사겠노라 했을 때 우리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뜨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재채기만큼이나 숨겨지지 않았던 설렘, 상대의 의미 없는 행동에도 심장을 쓸어내렸던 떨림. 우리는 그것을 섣불리 사랑이라고 믿었다.

햄버거보다 찌개가 더 잘 어울리는 남자. 실은 햄버거를 더 좋아하는 남자. 가난이 자랑인 수학을 사랑하는 남자. 선지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난생처음 해장국의 물컹한 선지를 삼켰다. 그가 푸는 수학 문제의 증명이 어디서 틀렸는지를 몰라 괴로워할 때 내가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그의 계산을 처음부터 가만히 들어주었던 것처럼. 서로를 잃어버린 세상의 반쪽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고충도 숙명이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하얀 꽃길을 성큼성큼 걸어 나는 학생이었던 그에게 시집을 갔다. 스와로브스키 큐빅으로 장식된 은박 양가죽 구두를 신고서.

우리는 결혼이 서로를 위해 평생 싫어하는 음식을 먹어 치우는 것쯤이라 생각했다. 결혼 후, 우리는 위 세 가지 공통점 외에 미처 몰랐던 수천 가지의 다른 점을 발견했다. 서로 동전의 다른 면을 앞면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다른 답안을 끌어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2만 원 이하의 옷은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는 2만 원 이상의 옷을 옷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가 해석기하학의 아버지인지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지를 두고도 치열하게 싸웠다. 그가 수식이 가득 적힌 두꺼운 책을 매일 읽으면서도 문학작품이라고는 종잇장처럼 얇은 시집조차 읽어본 적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당혹스러움. 사소하지만 지키고 싶었던 일상들이 무심하게 ‘푹’ 하고 짜버린 치약의 중간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화장실이 따로 떨어진 작은 방 하나. 그곳에서 우리는 신혼을 시작했다. 숨을 곳이 없는 작고 작은 공간. 짧은 시간에 서로의 너무 많은 것이 간파되었다. 작은 습관의 차이가 만드는 불편함에 대해 최대한 잔인하게, 가족까지 들먹거리며 서로를 괴롭혔다. 밤이 되어도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애인의 계몽을 위하여.

결혼 생활에 대해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서평과 비슷한 대답을 했다. 아주 많이 아프거나 믿는 도끼에 다리가 부러져도 괜찮을 정도의 결심이 아니라면 하지 말 것. 신혼은 남편과 나의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끝까지 읽겠노라 결심했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 덮어버리고 싶었던 책. 길고 난해한 프루스트의 문장처럼 어려운 글. 아마 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풀려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풀릴 수 없는 문제, 난제.

우리는 어느덧 결혼 십 년 차 부부가 되었다. 우리는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도는 동안 아홉 번의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또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학자인 남편은 저녁이면 낮 동안 풀리지 않았던 계산 때문에 울상을 짓는다. 내 책장에는 아직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편, ‘스완네 집 쪽으로’가 숙제처럼 꽂혀 있다. 책등의 자국이 반도 접히지 않은 채. 삶의 작고 큰 문제와 갈등도 늘 우리 삶에 머물러 있다. 분명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달라진 것은 남편에게는 수식보다 더 사랑하는, 나에게는 어느 글보다 흥미진진한 두 딸이 생긴 것이다. 우리 둘 사이에 생긴 공통분모는 주기능이 아닌 기능들을 과감히 삭제하게 만들었다. 서로의 음식 취향은 사라졌고 식단은 아이들에게 맞추어져 버렸다. 새로 생긴 부모에 대한 반감은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무뎌져 버렸다. 아이가 태어나고 장만한 중고차는 점점 엔진의 힘이 약해져서 이제는 에어컨을 꺼야 언덕을 올라갈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조금 덜 열정적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화기에 대고 가볍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속삭이지 않을 진중함.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한 적당한 무관심. 어떤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무 눈을 오래 두지 말 것. 오래 씹을수록 좋은 문장은 부산하게 옮겨 적기보다는 마음속에서 깊이 우릴 것. 읽기 괴로울 때는 잠시 덮었다가 읽을 것. 그렇게 나는 프루스트의 책 대신 남편이라는 긴 책을 읽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인정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도 참기 힘든 나와 함께해주는 상대가 존경스럽다는 것을.

존경으로 바라보면 안 보이는 것들도 보인다. 갑갑하게만 보였던 그에게서 꼼꼼함이 보이고 느리게만 느껴졌던 그의 일처리에서 깔끔한 마무리를 느낀다. 시작은 잘하지만 마무리가 늘 흐지부지되는 나. 시작은 어렵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는 남편. 우리는 서로 내가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고 거들먹거리면서 서로의 불씨와 기름이 된다. 서로 기능은 달라도 힘을 모아 피운 불로 손을 녹이며 같은 집을 짓는 우리. 서로에게 영어사전 속의 인테그랄(integral)의 뜻처럼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사람은 모두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유의미한 것을 찾기 위해 살아간다. 처음 우리가 만나 함께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서로를 운명이라 믿었던 순간, 쉬이 진정되지 않았던 두근거림.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던 약속. 졸업과 동시에 고학력 실업자가 되어버린 한 수학자의 텅 빈 통장. ‘고동고동’ 처음 들은 뱃속 아기의 심장소리. 낯선 도시, 낯선 사람, 낯선 상황. 지독했던 산후 우울증. 기다림 끝에 얻은 직장. 작지만 함께 이뤄낸 안락한 공간, 가족이라는 울타리. 많은 지표들은 삶 속에 다르게 적혀 각자의 그래프를 만든다.

수학에서 두 함수의 그래프가 둘러싼 영역의 면적을 구하는 법, 인테그랄 또는 적분. 인생이라는 한정된 구간에서 ‘나’와 ‘그’의 그래프가 만들어 낸 영역의 면적이 ‘우리’라는 인테그랄이다. 서로 다름이 의미 있는 면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태초에 창조주는 우리를 다른 한쪽의 기능은 아예 없는 부품으로 만들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액셀이라면 그는 브레이크 같아서 같이 밟으면 우리의 스텝은 엉킨다. 운전에도 조화가 필요해서 액셀만 밟고는 코너를 돌 수 없고 브레이크만 밟고는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기대했던 꽃길도 아니고 우리가 챔피언도 아니지만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가다보면 함께 세상이라는 트랙도 노련하게 달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오랜 후, 트랙의 마지막 코너를 돌고 나면 언젠가 맞이할 한 사람의 종착점. 순리의 시간. 먼저 떠날 상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면.

“당신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어.”

“잘 가.”

“또 만나.”

어느 시구처럼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할 수 있다면. 그때는 지금은 감히 부르지 못하는 그 단어, 그 유의미한 값, 사랑으로 서로를 불러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