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식민지 30년째 광화문거리의 비애
‘나그네 설움’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 30년째에 접어든 우리 민족의 풍찬노숙 같은 삶을 얽은 곡조다. 내 땅인데 남의 나라 이름의 식민지 국민의 마음은 간곡한 것도 지극한 것도 없고 그저 허망할 뿐이다. 이 황막함을 음유한 노래 속에는 일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감이 결기로 어려 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가워라/ 가야 할 지평선에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 서리가 뼈골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쏘냐’(가사, 1·3절)

이 노랫말이 쓰인 배경지는 1940년 광화문 거리,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앞이다. 어느 날 백년설이 요시찰(要視察) 인물로 불려가서 취조를 당하고 나온 저녁 시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던 조경환(고려성)과 대포 술을 나누면서 한탄한 사연이 담겼다. 담뱃갑에 적은 백년설의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가워라’에서 3절 가사가 나왔다. 이 시기는 치욕의 기간으로 우리네 형님, 누이들은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징용됐다. 이를 피해 간도·만주·사할린·상하이로 떠돌기도 했다. 토지를 몰수당하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신사에 참배하고, 쇠붙이를 공출당하고…. 이 노래가 실린 앨범이 10만여 장이나 팔린 것은 나그네의 하소연 같은 가사·가락이 대중의 심금(心琴)을 후벼 팠기 때문이리라.

당시 25세 나이였던 본명 이창민, 백년설은 191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문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일본에 유학한다. 그 후 1938년 일본 고베에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박영호의 권유로 전기현 작곡의 ‘유랑극단’을 취입하면서 가수로 데뷔해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등을 불렀다. 그는 1978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살다가 198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타계했다. 부인은 1952년 ‘한강’을 부른 가수 심연옥이다.

본명 이삼동으로, 동양의 슈베르트로도 불린 작곡가 이재호는 1919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해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고등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귀국 후 처음에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무적인’이라는 필명으로 작사·작곡을 하다가 이재호라는 예명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북방여로’ ‘나그네 설움’ ‘산팔자 물팔자’ ‘불효자는 웁니다’ 등으로 인기를 모으고, 태평연주단을 이끌고 국내와 만주 일대까지 순회공연을 하며 이름을 떨쳤다. 광복 후에는 결핵 치료 차 고향 진주에 내려가 모교 진주중학교에서 음악교사를 지냈다. 작곡가 이봉조(1931~1987)가 이때 그의 제자였다. 6·25전쟁 이후 다시 작곡활동을 했으며,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어라 기타줄’ 등의 히트곡을 내놨다. 1960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식민지 30년째 광화문거리의 비애
2017년 도널드 트럼프가 대권을 잡은 미국에도 나그네가 생겼다. 1987년 스팅이 불러서 인기를 얻은 노래 ‘잉글리시맨 인 뉴욕(Englishman in New York)’이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 노래는 미국에 살고 있는 영국인 나그네를 읊었다. 유행가는 노래가 탄생한 그 시점을 현재 상태로 정지시켜 놓은 질그릇이다.

유차영 < 한국콜마 전무이사·여주아카데미 운영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