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냉장고는 어떻게 여성의 삶 바꿨나
냉장고는 음식 보관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감자를 건초로 싸는 수고나 당근을 모래에 묻는 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매일 장을 보지 않아도 되고 재료를 대량으로 구입할 수도 있게 됐다. 냉장고의 등장은 건강과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유와 고기 소비가 늘어 건강해졌고, 남은 음식을 재사용할 수 있어 음식 쓰레기가 줄었다.

1914년 현대식 전기냉장고를 탄생시킨 사람은 미국 뉴저지의 주부 플로렌스 파파트다. 아이스크림 제조기, 식기세척기를 발명한 이도 여성이었다. 고된 가사 노동에 시달리던 그들이 고안한 주방 가전은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고 일상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청결 기준과 음식 준비에 대한 기대치도 함께 올라갔다.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는 냉장고를 포함한 100가지 물건을 통해 여성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본다. 영국 여성학자 매기 앤드루스와 재니스 로마스가 함께 썼다. 100개의 물건은 ‘아내와 가정주부’ ‘과학과 기술’ ‘패션과 의상’ ‘노동과 고용’ 등 8개 주제로 나눠 담았다.

책은 물건을 통해 여성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고, 그 변화가 오늘에 전하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코르셋과 타자기, 재봉틀, 피임약 등 물건당 네 쪽 분량으로, 한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다양한 에피소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정에 국한돼 있던 여성의 관심이 점차 공적 영역 참여로 확산하는 과정이 이런저런 물건들의 이야기를 관통한다. 저자들은 “여성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제약과 통제, 한계에 의해 기록돼왔다”며 “하지만 수동적이지 않으며 그저 피해자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고 강조한다.

여성과 페미니즘의 역사에 대해 무겁지 않으면서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책 제목엔 ‘세계사’란 단어가 있음에도 100개 물건 중 ‘중국의 아기 포대기’와 ‘타지마할’을 제외하면 모두 미국과 유럽의 사례에 치중된 점은 아쉽다. (홍승원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456쪽, 1만9800원)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