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신 시각으로 풀어낸 사랑·질투·욕망·분노
그리스신화가 이렇게 '막장'이었어?…연극 '헤·아·아'
"니(아르테미스) 아빠(제우스) 섹스의 9할 9푼이 강간이야.", "때리는 새끼가 미친놈이지. 점잖게 돌아다니다가 제 여자 때리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몰래 봐놓고 몸매가 좋다고 하면 괜찮은 거야?"
그리스 신화 속 여신들 입에서 거친 말들이 쏟아진다.

이들은 제우스의 아내 헤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다.

무대 위 세 여신은 고전 속에서 본 신이 아니다.

헤라는 바람피우는 남편 뒤만 쫓는 한심한 신이 됐고, 아프로디테는 색을 탐하는 데만 집중하며, 아르테미스는 욕망을 숨긴 채 처녀를 고집하고 집착한다.

여신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우스는 싸움 끝에 헤라를 때리고, 아프로디테와 헤어진 아레스는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닌 년은 당해봐야 해!"라며 막말을 한다.

그리스신화가 이렇게 '막장'이었어?…연극 '헤·아·아'
4일 오후 대학로 콘텐츠그라운드에서 진행된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프레스콜에서 현대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한 여신들은 미국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속 여주인공들처럼 여성의 속마음을 유쾌하고 거침없이 보여줬다.

작품은 2016년 '산울림고전극장'으로 첫선을 보여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연장 공연까지 했고, 대본은 제4회 연극인대상에서 '극작상'을 받았다.

전막 시연 뒤 마련된 질의응답에서 이기쁨 연출은 "공연을 거치면서 대본을 조금씩 수정해 왔지만 이번에는 크게 고치지 않았다.

초연 때와 비교하면 시선이 많이 변했지만 여전한 것들도 많다.

똑같은 텍스트지만 새롭게 의미를 재탄생시키기 위해 흥미롭게 작업했다"며 2년 만에 대학로 무대로 돌아온 소감을 밝혔다.

극작 겸 배우 한송희는 작품을 쓴 계기에 대해 "그리스 신화를 먼 옛날 얘기라고 하면 와닿지 않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황당한 내용이 많았다.

사랑, 삶, 일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하는 현대 여성들과 모습이 닮은 여신을 그려보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초연 이후 4년 사이에 여성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사회 전반적으로 불거지고 관심도 커지고 더 공론화했다.

이런 게 갑자기 터진 게 아니라 여성들 마음에 불평등, 불합리함이 있었을 거다.

미투, 강남역 살인사건 등을 통해 작품도 생명력을 얻어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스신화가 이렇게 '막장'이었어?…연극 '헤·아·아'
이기쁨 연출은 "익히 아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아직도 먼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시선을 가진 작품이다.

저희가 작품 의미를 계속 찾아가는 것처럼 관객도 새로운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공연으로 남는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헤라'는 한송이, '아프로디테'는 이주희, '아르테미스'는 김희연이 연기한다.

이강우·조용경은 '제우스, 아레스, 아폴론'으로, 장세환은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악타이온, 아도니스, 오리온'으로 등장한다.

오는 29일까지 콘텐츠그라운드에서 공연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