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빌 게이츠 아내 아닌 자선사업가로서의 삶
6년 동안 사내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출산을 앞두고 10년간 일한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입사했던 작은 벤처기업이 퇴사할 땐 IBM의 시가총액을 넘어선 덕에 경제적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남편은 회사 창업자 빌 게이츠였다.

이후 전업주부로 살아가던 멀린다는 우연히 한 신문 기사를 보게 됐다. 설사로 수백만 명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왜 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 그가 품은 의문은 2000년 세계 최대 민간 자선단체인 빌&멀린다게이츠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누구도 멈출 수 없다》는 멀린다가 처음 쓴 에세이다. ‘세계 최고 부자의 부인’에서 ‘세계 최대 자선단체의 공동의장’이 됐지만 편견의 벽은 단단했다. 재단 대표로 발언할 일이 있으면 빌 게이츠가 연단에 섰다. 공식석상에서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고 공동의장이었음에도 언론에서는 ‘빌의 재단’이라고 칭했다.

저자는 이 불균형을 바로 잡기로 하고 내부에서부터 목소리를 낸다. 남편과 함께 연례 서한을 쓰는 작업을 했을 때는 “이러다 서로를 죽이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크게 싸웠다”며 “‘여기서 우리 결혼이 끝날 것 같은데’란 느낌까지 들었다”고 고백한다. 개인적인 사연까지 속속들이 공개한 이유는 “여성들이 평등한 부부관계를 쟁취하는 것은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를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고, 각자의 이야기를 공유할 때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재단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순간부터 조금씩 변화를 이뤄가는 과정을 세심하게 엮어간다. 《팩트풀니스》의 저자인 한스 로슬링,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말랄라 유사프자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 얻은 영감과 말라위, 니제르, 케냐, 인도 등 빈곤과 질병이 가득한 현장에서의 경험을 생생하게 펼쳐놨다.

올 10월 저자는 여성의 권한을 강화하는 데 10년간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성의 삶이 바뀌어야만 세계가 빈곤과 질병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멈출 수 없는’ 발걸음이 향하는 곳, 그 발걸음이 이뤄갈 변화의 흐름이 궁금해진다. (강혜정 옮김, 부키, 392쪽, 1만8000원)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