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92세 원로학자가 말하다…"경제학은 인간 중심 학문"
“처음 회식자리에서 만난 박 대통령은 서민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신’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 들어 ‘아! 권력이 저렇게 변하도록 만드는구나!’하고 놀란 적도 있다.”

‘행동하는 지성’으로 잘 알려진 진보 경제학계의 원로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92)는 회고록 <학현일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이렇게 기억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에 평가교수단으로 참여한 그는 1967년 2월 열린 평가대회에서의 한 장면도 기록했다. ‘부익부 빈익빈’의 부작용에 대해 그가 보고하자 대통령과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재무부 장관 등이 참석한 회의장이 술렁였다. 당시 장기영 경제부총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런 일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변 교수는 “비판은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며 “밤을 새워서라도 토론하자”고 응수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인사가 자신을 ‘미친 사람’이라고 몰아세웠던 것도 떠올렸다.

1927년 황해도 황주군에서 태어난 변 교수는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진학 한 뒤 부모님과 생이별하던 순간을 진솔하면서도 담담하게 서술한다. 해방 후 1946년 여름방학 때 찾은 고향에선 토지를 몰수해 분배한다는 토지개혁 설명회가 열렸다. 거기서 “최소 생계수단이 될 정도의 토지는 남겨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반동’으로 낙인찍혔다. 체포를 피하려고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자 그의 어머니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잘 가라”며 “건강하라, 의젓하고 떳떳하라”고 당부했다.

변 교수는 1955년 강사로 시작해 37년간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교의 울타리도 엄혹했던 유신, 군사정권 시대엔 무력했다. 비상계엄령 확대 직전인 1980년 5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으로 불린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취조를 받고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당하는 시련도 겪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학문의 고개를 오르고 넘겠다는 의지를 담은 그의 호 ‘학현(學峴)’처럼 수많은 경제학도를 양성하면서 학문적인 성취를 이뤄냈다. 1950년대 경제수학, 통계학, 수리경제학, 계량경제학을 한국 경제학에 도입했고 1960년대 경제발전론과 경제변동론을 국내에 소개했다. 1987년에는 한국경제신문이 다산 정약용의 경세제민 정신과 실학사상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다산경제학상을 받았다. 해직 교수 시절 설립한 학현연구실은 퇴임 후 서울사회경제연구소로 확대 개편했다. 균형적 경제발전, 자립경제를 강조하면서 김대중 대통령 때는 제2건국위원회 대표공동위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마셜학파’의 대가인 그는 책에서 ‘케임브리지대를 경제학의 메카로 만든 마셜에 흠뻑 빠진 서울대 상대 학부 시절’을 떠올린다. 회고록의 처음과 끝도 앨프리드 마셜로 장식한다. 변 교수는 마셜이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됐을 때의 취임사 중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제자를 가르치겠다”는 구절을 인용해 책을 시작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마셜의 힘을 빌려 후배 경제학자들에게 진심으로 조언한다. ‘시장이냐 정부냐’는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라는 것이다. “마셜은 <경제학원리> 첫 페이지에서 ‘경제학은 부의 축적에 관한 연구인 동시에 인간에 관한 연구의 일부’라는 명언을 남겼다. 경제학은 인간 중심의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