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38명 감독과 138편 작업, 임권택 감독과 오랜 동지"
"한국영화 미래 밝지만 독립영화 키워야"
[부산영화제] 정일성 "영화 촬영 60년…제 원천은 불행한 근현대사"
"제가 오랫동안 영화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불행한 근현대사 덕분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불행한 근현대사를 거치며 고통과 기쁨, 슬픔을 같이 나눴던 우리 세대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아흔살 거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기품과 연륜이 넘쳐흘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60여년간 한국영화 역사를 일궈온 거장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와 겸손, 카리스마가 넘쳤다.

올해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인 정일성(90) 촬영 감독을 4일 부산 기자회견에서 만났다.

그는 "개인적으로 영광"이라며 "앞으로 좋은 촬영감독에 보다 많은 회고전의 기회가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부산영화제] 정일성 "영화 촬영 60년…제 원천은 불행한 근현대사"
정 감독은 촬영을 예술 차원으로 끌어올린, 미학적 촬영의 선구자로 꼽힌다.

1929년생인 그는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20대 후반에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1957)로 영화 촬영에 입문했다.

이후 총 38명의 감독과 138편을 찍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서는 파격적인 앵글과 색채 미학을 선보였다.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에서는 사계절을 담기 위해 1년 이상 촬영하는 열의를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임권택 감독과는 30여년간 함께 작업한 동지다.

두 사람은 '신궁'(1979)으로 처음 만난 뒤 '만다라'(1981), '서편제'(1993), '취화선'(2002), '천년학'(2007)에 이르기까지 명콤비로 활약했다.

정 감독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 독재정권, 민주화 운동 시기를 되짚으며 영화 인생을 되돌아본 뒤 "긴장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영화인으로서 영화를 통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 하는 정신무장 같은 게 됐다"고 떠올렸다.

아울러 오랫동안 일한 원초적인 힘으로 "분단 상황"을 꼽은 뒤 "분단에서 비롯된 아픔과 이념 갈등, 가족 해체 등을 통해 영화가 상호발전해오는 과정에서 저도 그 일원으로 성장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함께 한 감독들과 아내에게도 공을 돌렸다.

"저를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한 힘의 원천 중 3분의 1은 함께 작업한 감독들이고, 3분의 1은 1년 중 6개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한 남편을 대신해 홀로 집을 지켜준 아내 덕분입니다.

나머지 3분의 1 정도가 제 능력이죠."
[부산영화제] 정일성 "영화 촬영 60년…제 원천은 불행한 근현대사"
그는 대표작을 뽑아달라는 말에 선뜻 몇편을 꼽지 못했다.

대신 성찰이 담긴 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183편 정도 찍었는데, 그중 40~50편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영화들입니다.

젊고 철없을 때는 흥행작이나 수상작을 대표작으로 뽑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부끄럽게 생각했던 그 40~50편의 영화가 교과서처럼 저를 지배합니다.

열심히 찍어서 모든 사람이 인정한 작품보다는 실패한 영화가 저에겐 좋은 교과서가 된 것 같습니다.

"
정 감독은 그러면서 "과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4·19와 5·16 이후로, 당시 영화계는 침체기였다"면서 "제가 찍었든, 안 찍었든 그 시기에 신상옥 감독의 몇몇 영화나 이만희 감독 '만추'(1966), 김수용 감독 '산불'(1967), 김기영 감독 '하녀'(1960) 같은 명작이 나왔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는 특히 김수용 감독과 임권택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1979년에 교통사고가 나서 대수술을 했을 때 저를 일으켜 세운 분이 김수용 감독입니다.

또 1980년에 암에 걸려 병원에 있을 때 저를 일으켜 준 분은 임권택 감독이죠."
그는 임 감독에 대해 "동시대 사회나 역사,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비슷해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면서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일해 매너리즘에 빠지면 서로에게 독이 될 수 있다고 함께 생각한 시기에 헤어졌다"고 떠올렸다.

촬영감독으로 롱런한 비결을 묻자 세 가지 원칙을 꼽았다.

"저는 원칙주의자입니다.

형식, 리얼리즘, 모더니즘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하지만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격조입니다.

격조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촬영감독이 만드는 것이죠. 리얼리즘의 경우 흔히 있는 그대로 찍는 것으로 아는데, 그 속에서도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없다면 한낱 뉴스나 기록영화와 다름없죠. 모더니즘은 일종의 '포즈(pause·멈춤)'입니다.

영화가 계속 긴장의 연속이거나 사실주의만을 추종하다 보면 재미가 없죠. 한 박자 쉬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엄청나게 재밌는 대사 앞이나 두려운 장면 앞에서 포즈를 둬야 더 재밌고 두렵게 느껴지죠."
[부산영화제] 정일성 "영화 촬영 60년…제 원천은 불행한 근현대사"
그는 요즘 한국영화가 "미국 영화만큼 재밌다"면서도 쓴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요즘 흥행한 한국 영화들을 보면 저는 그렇게 촬영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제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저는 한 번도 아름답게 찍으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어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을 어떻게 극대화해서 사람들에게 역사의 이어짐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혔죠. (최근 흥행작들처럼) 미국 영화의 아류처럼 찍고 싶지는 않습니다.

"
정 감독은 후배 감독들에 대한 애정도 표시했다.

그는 한국영화 100년이 되는 해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데 대해 "개인적으로 축하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눈여겨보고 있는 후배 감독을 꼽아달라는 말에는 "이름을 거명하면, 거론되지 않은 감독들에게 왕따당할까 봐 못하겠다"고 웃었다.

대신에 후배들을 위해 애정이 어린 조언을 건넸다.

그는 "요즘 젊은 감독들은 필름으로 촬영한 사람을 골동품 취급한다"며 "필름을 완벽하게 이수하지 않으면 디지털로도 좋은 영화를 촬영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울러 "한국영화 미래는 밝다"면서도 "기업들이 독립영화 작가들에게도 투자해 대형 영화에 대적할 만한 토대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부산영화제] 정일성 "영화 촬영 60년…제 원천은 불행한 근현대사"
이번 회고전에는 김기영 감독의 '화녀'를 비롯해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1980),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 김수용 감독의 '만추'(1981),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1986), 장현수 감독의 '본 투 킬'(1996) 등 7편이 상영된다.

그는 "회고전 작품은 내가 정한 게 아니다.

예상치 못한 작품도 포함돼 있다"면서 "제 영화라고 해서 다 좋으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한 작품들을 통해서도 정일성의 참모습을 보실 수 있지 않나 싶다"며 웃었다.

정 감독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을 묻자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면서도 한가지 소망을 밝혔다.

"과거 했던 영화를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영화라는 게 내 마음대로, 나 혼자 정리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를 모르는 젊은 감독이 어느 날 느닷없이 '같이 영화를 하자'고 제안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길이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