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스님을 한글 창제의 주역으로 그려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킨 영화 ‘나랏말싸미’의 한 장면.
신미스님을 한글 창제의 주역으로 그려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킨 영화 ‘나랏말싸미’의 한 장면.
“그 장자가 반쪽 글자를 가르치고 다음에 성명론(聲明論)을 말하듯이, 나도 그와 같이 제자들에게 반쪽 글자인 아홉 경전을 말하고 다음에 성명론을 연설하노니….”

석가모니의 최고·최후 가르침을 담은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반쪽 글자란 반자(半字), 즉 고대 인도 산스크리트 문자의 자음과 모음을 가리킨다. 불경에는 반만이교(半滿二敎)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글자의 자모를 가르치는 반자교(半字敎)와 이들 자모를 합성한 음절문자를 가르치는 만자교(滿字敎)를 이른다. 알파벳을 먼저 가르친 뒤 영어를 가르치듯이 소승의 구부경전을 먼저 알려준 후 대승경전을 가르친다는 것을 석가모니는 이렇게 비유했다.

여기에 신미 대사를 한글 창제의 실질적 주역으로 그린 영화 ‘나랏말싸미’의 역사 왜곡 논란을 풀 실마리가 숨어 있다. 산스크리트 문자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졌다는 것, 표의문자가 아니라 표음문자이며 음절 단위의 문자였다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문장의 분석문법인 비가라론과 음성이론인 성명기론(聲明記論)이 불경의 전파와 함께 고려, 조선에도 전해졌고, 신미 대사가 세종대왕에게 발탁돼 한글 창제에 참여하면서 자음과 모음으로 글자를 구성하는 산스크리트 문자의 방식이 적용됐다는 것이다.

"한글 창제 주역은 '팀 세종'…신미는 후반 작업 참여"
정광 고려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한글 창제 과정을 동아시아 문화권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핀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정 교수는 2015년 출간한 《한글의 발명》에서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이 원나라를 세운 뒤 제정한 파스파 문자가 한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해 학계의 주목과 비판을 동시에 받은 바 있다. 이번 책에서는 그간 제기된 비판에 대한 반론의 성격으로 쓴 논문들을 중심으로 한글이 세종의 독자적 발명품이 아니라 ‘팀 세종’의 집단적 발명품이라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 국내뿐만 아니라 인도, 몽골, 중국, 일본 등 한반도 주변 동아시아 각국의 문자 역사를 두루 섭렵한다.

저자가 동아시아 각국의 문자 역사를 살피는 것은 한글 창제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문자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동아시아 각국에선 말은 달라도 한자의 신세를 져야 했다. 하지만 글자를 순서대로 나열해서 쓰는 고립적 문법 구조를 가진 한문과 달리 알타이 민족의 언어는 어미와 조사의 기능이 중요한 교착어여서 한자로 표기하기엔 너무나 불편했다.

이 때문에 알타이 민족은 끊임없이 한자를 변형하거나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려고 시도했다. 7세기 티베트의 송첸캄포 대왕이 인도에 유학승을 보내 개발한 서장문자는 비가라론을 적용한 표음문자였다. 이후 중국 북방의 여러 민족은 새로운 국가를 세울 때마다 새로운 문자를 제정했다. 칭기즈칸은 위구르 문자를 빌려 몽골-위구르문자를 만들었고, 쿠빌라이칸은 티베트의 팍스파 라마에게 제국의 언어를 모두 적을 수 있고 한자 표기에도 적합한 표음문자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파스파 문자다.

저자는 훈민정음 또한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새롭게 건국한 조선이 비록 명나라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었지만 세종은 독자적인 문자 창제를 비밀 프로젝트로 추진했다는 것이다.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는 ‘영명하신’ 세종이 신화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이뤄낸 게 아니라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음성·음운론을 비롯해 그 영향을 받은 중국의 음운론과 파스파 문자 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만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과정에는 당연히 세종뿐만 아니라 집현전 학자와 신미를 비롯한 스님, 지식인들이 두루 참여했다는 얘기다.

책에는 전작과 같은 맥락에서 한글 창제에 관한 그간의 정설과 통설을 뒤집는 파격적인 내용이 가득하다. 훈민정음 창제 동기가 백성들의 문자생활을 위한 세종의 애민정신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저자는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 불상유통)’이라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구절을 근거로 제시한다.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리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저자는 북경어가 표준어가 되면서 이전의 한자음에 익숙한 조선과 중국 사이에 같은 한자를 놓고도 음이 다르게 쓰였고 그래서 불편해졌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중국식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발됐으며, 나중에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까지 쓰임새가 확장됐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한글 창제 과정에서 신미 대사의 역할이 중차대했을까. 저자는 “신미 대사의 공이 절대적이라는 재야 학자들의 시각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선을 긋는다. 다만 “신미 대사는 산스크리스트어에 관한 지식을 토대로 세종이 개발한 17자의 자음 외에 모음 11자를 추가했다”고 주장한다. 신미는 한글 창제 초기부터가 아니라 자음이 개발된 뒤에 참여해 모음을 추가했고, 그 결과 초성·중성·종성의 한글 구조가 완결됐다는 얘기다.

저자는 한글에 대한 무조건적 예찬과 신성화를 경계한다. 그러면서 한글에 대한 비교 연구는 그 우수성과 긍지를 훼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이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