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중국에서 서울로 압송된 후 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당시 이규채의 수형기록 카드.  /일빛 제공
1935년 중국에서 서울로 압송된 후 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당시 이규채의 수형기록 카드. /일빛 제공
“2000만 민중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독립운동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섬뜩하리만큼 결연한 이 말은 독립운동가 이규채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뒤 남긴 진술 중 일부다. 출처는 1934년 12월 8일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의 사법 경찰관 후지이 다다오가 쓴 청취서. 하얼빈에 있는 조선총독부 특무기관에서 파견된 한 인사가 이규채에게 “만주 연길현에 한족자치구를 설치하는 것을 일본이 고려하고 있다”며 의견을 묻자 그가 답한 말도 기록돼 있다. “나의 정치적 견해는 한국의 독립이지 자치 따위의 문제는 고려할 여지가 없다.”

[책마을]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 이규채…치열했던 항일투쟁의 기록
《이규채 기억록》은 이규채가 직접 쓴 연보뿐 아니라 그와 관련한 신문기사와 청취서, 신문조서, 판결문 등 형사소송기록을 모두 모아 엮었다. 1890년 경기 포천에서 태어난 이규채는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충청도 대표와 1930년대 한국독립당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을 지냈다. 1932년 9월 일제의 중국 관내 침공의 교두보였던 하얼빈의 쌍성보 전투에서 참모장으로 참전해 1차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는 최초의 한·중 공동 항일 전투 성과로 꼽힌다. 조선인의 자립 경제와 독립운동 기지 구축 활동을 전개할 생육사(生育社) 조직을 추진했고, 중국 및 베트남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 전선을 확대할 방안을 모색했다.

책을 엮은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은 “그가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며 “후손과 면담하면서 집안에 전해져오는 이야기와 관련 유품, 자료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무엇보다 ‘1890년 6월 7일 자시에 군자정에 있는 옛집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자술 연보가 눈길을 끈다. 짤막하게 이어지던 기록은 1920년대 들어 이규채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길고 자세해진다.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영사가 털옷 한 벌을 내주었으나 내가 물리쳤다’는 대목이나 법정에서 기립하라는 판사에게 “의자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앉아서 문답을 했다는 서술에서는 어떤 것에도 굴함이 없는 그의 꼿꼿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자녀가 셋이나 있는데 그들 역시 생각하지 않는가”라는 판사의 회유에 그는 답한다. “나에게 노모가 계시는데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어찌 자녀를 염두에 두겠는가. 많은 말을 할 필요 없이 단지 우리 강산만 돌려주면 그만이다.” 이를 들은 ‘동생과 형이 눈물을 흘렸다’고 그는 적었다.

한 독립운동가 개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기록이지만 그 안엔 독립투사로서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뿐 아니라 독립운동가 사이에서의 대립과 갈등, 험난한 여정에서 마주한 죽음의 위기가 담겨 있다. 신문조서와 재판 내용은 일본어로 된 원문과 함께 번역문을 수록해 기록의 의미를 살렸다. 평범한 생활을 포기하고 스스로 택한 역경의 길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이 함께 그려지기에 800쪽이 넘는 책이 더 묵직하게 와 닿는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