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호 화백이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의 개인전에 출품한 자신의 작품 ‘바람의 꽃’을 설명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이신호 화백이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의 개인전에 출품한 자신의 작품 ‘바람의 꽃’을 설명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1999년 8월 남편 김기동 화백이 교통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다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1960~1970년대 시대적 고뇌와 산업화 과정의 아픔을 감내하며 화가로 살다 간 남편의 그림을 다시 꺼내 보며 가슴을 쳤다. 그 슬픔을 넘어서기 위해 빠져든 게 꽃 그림이었다. 고희를 앞둔 중견 작가 이신호 화백(69)이 꽃 그림으로 사부곡(思夫曲)을 부르는 사연이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18일 개인전을 시작한 이 화백은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을 잊기 위해 작업을 이어왔다”며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얼마나 성실한 모습으로 남편이 살아왔는가를 당당히 예술로 승화해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동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이 화백은 남편 작고 이후 다양한 꽃에서 현대적 시각예술을 뽑아내리라 다짐했다. 초창기 진경 산수화와 문인화에 몰두한 그는 한지와 붓, 먹,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우리 토양에서 자라난 꽃의 아름다움을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형상화했다. 남편이 생전에 유독 좋아한 꽃들을 골라 화폭에 옮긴 그의 작품은 한지라는 전통 재료를 활용해서인지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의 꽃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연이 지닌 넉넉함, 무욕, 정감으로 옮겨갔다. 주로 전국에서 자생하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을 비롯해 호절란, 인동초, 장미, 국화, 무궁화, 철쭉 등 꽃무리 중에서 방긋 입을 벌린 꽃 송이를 클로즈업해 평면회화로 풀어냈다.

이 화백은 “제 꽃그림은 한국화 장르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여자가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가는 그림으로 이해해 달라”고 했다. 올해 20주기를 맞은 남편을 생각하는 그의 특별한 마음은 이번 전시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전시회 주제를 영겁의 시간 속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삶을 은유한 ‘바람의 꽃’으로 정하고 먹에 아크릴을 혼합해 단아한 색감으로 꽃의 생명력을 되살려낸 근작 30여 점을 내보인다. 새봄을 맞아 좋은 사람들과 꽃향기를 나누고 싶은 화가의 마음을 담았다.

붓에 물감을 슬쩍 스친 듯이 묻혀 그리는 갈필과 압필을 병용한 그의 작품에는 남편과 사별한 아픈 편린을 드러내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 태도와 예술정신이 녹아 있다. 세상 풍파에 버텨 꽃 피우고 마침내 꽃씨를 남기는 강인한 생명력을 한지 위에 담아내 ‘생존과 버팀’의 미학으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사는 순간순간이 한 폭의 그림’이라는 이 화백은 “내가 찍은 점 하나, 한 획의 선은 곧 내 삶의 표현”이라며 “붓, 물감, 화선지는 앞으로도 내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 내 가슴 한편에 간직한 고귀한 사랑과 희망을 표현해 주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인화 계열의 꽃 작업도 온화하면서 고요한 분위기를 내뿜는 필법이 마치 풍경화처럼 느껴진다. 절묘한 ‘무기교의 기교’의 감성 세계도 엿보인다. 이 화백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 산수화의 장점과 현대 미술의 조형미를 융합했다”고 강조했다. 또 작가는 항상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우리 것을 유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가 전통 산수화와 현대미술의 접점을 찾아 나선 까닭이다. 전시는 다음달 8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