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간수대문이 이어진 홍지문은 한양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 한북문이라고도 불렸다.
오간수대문이 이어진 홍지문은 한양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 한북문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읍지였던 한양에 도성을 쌓을 때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세웠는데 이 문을 경계로 도성 안과 도성 밖으로 나뉜다. 서울의 역사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안에는 조선왕조 궁궐의 문화유산이, 도성 밖에는 수려한 풍경을 따라 별서(별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도성 밖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따라 여행을 떠나보자.

도성 밖 이야기는 창의문에서 시작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사소문의 북문이다. 숲과 계곡이 울창한 골짜기에 자줏빛 노을을 뜻하는 자하(紫霞)가 아름답게 내려앉아 자하문이란 별칭으로 불렸다. 자하문은 북한 쪽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조선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문을 닫고 통행이 금지됐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자하문 밖의 종로구 구기동, 신영동, 부암동, 평창동, 홍지동을 한데 아울러 ‘자문밖’이라 부른다. 자문밖은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풍경이 수려하다. 그런 이유로 아름다운 별서가 많이 지어졌고, 지금은 박물관 미술관 같은 문화·예술시설이 모여 있다.

한·중 건축양식이 조화 이룬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자문밖 대표 문화유산으로 석파정이 있다. 서울의 모습이 변하면서 조선시대 많은 정자가 사라졌지만 부암동에 있는 석파정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석파정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이던 김흥근의 별서였다. 세 갈래의 내(川)가 합쳐져 흐르는 곳이라,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삼계동정사’로 불렀다. 고종이 즉위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별서는 그의 소유가 됐다. 별서의 앞산이 모두 바위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정자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꿨다. 고종은 이곳을 행전이나 행궁 시 임시 거처로 사용하며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했고, 흥선대원군은 사랑채에서 대신들과 국사를 논의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옛 모습을 간직한 자문밖 대표 문화유산 ‘석파정’.
조선시대 옛 모습을 간직한 자문밖 대표 문화유산 ‘석파정’.
사랑채 옆에는 굴곡진 역사를 견뎌낸 노송이 넓은 가지를 드리운다. 그 앞에는 계곡이 낮게 흐르고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너럭바위 위에 얹어 놓은 듯 포개진 커다란 바위에는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 그대로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드리운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별서 뒤 언덕에는 키 큰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운치 있다.

굴곡진 역사를 견뎌낸 석파정 사랑채 옆 노송.
굴곡진 역사를 견뎌낸 석파정 사랑채 옆 노송.
석파정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중국 청나라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다. 자연을 벗 삼은 석파정 정원에는 고풍스러운 별서가 있고, 중국풍 정자가 있다. ‘유수성중 관풍루’라는 중국풍 정자는 청나라의 문살 문양과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감한 이국적이고 독특한 건축물이다.

정원을 둘러싼 인왕산 자락에 펼쳐진 바위산은 코끼리 형상을 닮아 ‘코끼리바위’라고도 한다. 영험한 기운이 풍기는, 조각한 듯한 바위는 소원을 이뤄주는 바위로 알려졌다.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이 바위 앞에서 득남을 빌어 소원을 이뤘고, 아들의 시험 합격을 빈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이뤄진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사의 흔적 간직한 무계원

조선의 마지막 내시 이병직의 집이던 오진암을 옮겨 놓은 ‘무계원’.
조선의 마지막 내시 이병직의 집이던 오진암을 옮겨 놓은 ‘무계원’.
무계정사는 조선시대 세종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 이용이 세운 별장이다. “그 어느 밤 꿈에 춘산을 거닐더니 무성한 숲속에서 도원을 찾았구나… 의당 전생에는 나의 산수였으리니 그대, 하늘이 숨긴 곳 훔쳤다 웃지 말기를.” 안평대군이 읊었다고 하는 문장처럼, 그는 꿈속에서 본 무릉도원이 무계정사의 풍경과 같아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안견은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안평대군은 이곳에 정자를 지어 시를 읊으며 때때로 무술 연마를 하고 활을 쏘기도 했다고 한다. 안평대군 글씨로 추정되는 ‘무계동’이 새겨진 바위는 무계정사 터에 남아 있다.

부암동 무계정사길을 따라 올라가면 멋스러운 한옥이 있다. 익선동에 있던 한옥 오진암을 옮겨온 것인데, 오진암은 원래 조선왕조의 마지막 내시이자 서화가였던 이병직의 집이었다. 오진암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정이었다. 서울시 등록 음식점 제1호이자 1910년대 초 대표적인 상업용 한옥으로,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불리며 군사독재 시절 즐겨 이용되던 은밀한 장소였다. 1972년 남북한 냉전체제를 대화 국면으로 이끈 7·4 남북공동성명을 논의한 역사적인 장소다.

2010년 오진암 자리에 관광호텔이 들어서면서 한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종로구는 호텔사업자와 오진암 건물을 이전하기로 뜻을 모으고 무계정사 옛터 근처로 옮겼다. 종로구 청진동, 조선시대 시전행랑 건물이 있던 자리에서 발굴한 돌로 석축을 쌓아 지은 고풍스러운 한옥은 ‘무계원’이라는 전통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광해군 폐위를 논하며 칼을 씻은 세검정

겸재 정선이 부채에 그린 ‘선면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복원한 ‘세검정’.
겸재 정선이 부채에 그린 ‘선면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복원한 ‘세검정’.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세검정은 홍제천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예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해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됐다. 세검정의 유래를 두고 세 개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광해군 15년,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이던 이귀, 김류 등이 이곳에서 광해군 폐위를 논하고 칼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이라고 한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영조 때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겨 도성을 지키고 북한산성을 수비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연산군 때 유흥을 위해 이 정자를 지었다고도 한다. 어느 이야기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는 그만큼 이 정자가 아름다운 풍광 속에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밖에도 부근에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가 있어서 역대 왕들의 실록 편찬이 끝나면 이곳에서 세초 작업을 했다고 한다. 세초란 실록 편찬에 사용된 사초(史草)와 원고를 없애는 일로, 종이에 먹물로 쓴 원고를 물에 씻어 글씨는 지우고 종이는 재활용했다.

이렇게 많은 사연을 간직한 세검정은 1941년 주변에 있던 종이공장 화재로 주춧돌 하나만 남기고 소실됐다. 현재 건물은 겸재 정선이 부채에 그린 ‘선면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1977년 복원했다. 겸재의 그림처럼 장마철이면 물 구경을 할 만큼 세차게 물이 흐르던 아름다운 풍경은 도심 속에 묻혀 정자 한 채만 남아 있다.

전란 겪지 않은 홍지문과 연회 베푼 탕춘대성

겸재 정선이 그린 ‘홍지문-수문천석’ .
겸재 정선이 그린 ‘홍지문-수문천석’ .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탕춘대성은 1719년(숙종 45)에 쌓은 것으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4㎞의 산성이다. 성의 이름은 연산군 때 세검정 동편 봉우리에 탕춘대(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를 쌓고 연회를 베푼 것에서 유래했다. 성안에 연무장인 연융대를 만들고 군량창고 등을 갖췄다. 탕춘대성은 한양 북쪽을 방어했다.

상명대 아래에 있는 홍지문은 한양 북쪽에 있는 문이어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했으나, 숙종이 친필로 쓴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달면서 정식 명칭이 됐다. 홍지문을 가로지르는 수문(水門)에 다섯 개의 칸을 틀어 오간수대문을 만들었다. 한 번도 전란을 겪지 않은 홍지문은 1921년 홍수로 홍지문과 오간수대문이 무너졌으나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다시 지어졌다. 겸재의 ‘홍지문-수문천석’을 보면 이곳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짐작이 간다. 겸재의 화폭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자문밖 풍경은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다.

글·사진=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