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밥으로 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컵밥’의 창립멤버인 송정훈(왼쪽부터) 박지형 김종근 대표가 자신들의 푸드트럭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다산북스 제공
컵밥으로 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컵밥’의 창립멤버인 송정훈(왼쪽부터) 박지형 김종근 대표가 자신들의 푸드트럭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다산북스 제공
‘최선을 다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삶을 태연하게 살아가는 모순의 시대에서 나는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장수한 퇴사학교 대표(33)가 쓴 책 《퇴사학교》의 한 구절이다. 사회에서 정해준 과제는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또 다른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늘 시달렸다. 그는 어렵게 입사한 삼성전자를 2015년 제 발로 나왔다. ‘한국 교육이 키워낸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던 그를 퇴사라는 결단에 이르게 한 것은 상상 속 ‘10년 뒤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가능할까. ‘덕업일치’(광적으로 좋아하는 ‘덕질’과 직업의 일치)를 실현한 밀레니얼 세대는 말한다. 가장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게 보람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먹고살 만하다고.

하고 싶은 일을 밥벌이로

덕업일치, 덕질과 직업이 일치했다
장 대표는 퇴사한 이듬해 5월 퇴사학교를 열었다. 첫 번째 입학생은 본인이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프로그램부터 구성했다. 학칙 중 하나로 ‘입학은 조용히 졸업은 화려하게’를 내걸긴 했지만 퇴사를 권유하는 곳은 아니다. 자신의 일을 돌아보고 꿈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수업의 가장 큰 목적이다. 장 대표는 “일은 곧 시간이고, 일에 쏟는 시간이 내 삶을 규정한다”며 “그런 측면에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은 한계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일은 일이고 삶은 삶이라고 딱 잘라 가르면 일을 최대한 줄여야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런 측면에서 퇴사학교는 자아 탐색 교육을 맨 앞에 둔다. 주변의 요구에 부응하느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방치되고 있진 않은지, 남의 시선을 의식해 실행을 주저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과정이다.

10여 년 공들인 쇼핑몰을 프랑스 로레알그룹에 4000억원을 받고 매각한 김소희 전 스타일난다 대표(35)는 좋아하는 일을 찾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겨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2005년 20대 초반에 스타일난다를 창업한 김 대표가 내건 슬로건은 ‘나는 노는 물이 달라’였다. 튀는 스타일로 개성을 드러내길 원하는 같은 세대의 취향을 저격했다.

‘노량진 컵밥’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한 ‘컵밥크루’는 실행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 성악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박지형 대표(35)는 5년 전 유타대 캠퍼스 앞 푸드트럭에 늘어선 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지인 2명과 함께 1500만원씩을 내 20년 넘은 낡은 푸드트럭 한 대로 ‘컵밥’을 창업했다. 빠르고 간편하면서도 취향대로 소스를 골라 먹을 수 있는 컵밥은 현재 미국 전역에 21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컵밥크루 창업 멤버들은 “나도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그런 사업 내가 하려 했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차이는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한 발 내디딜 용기를 낸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를 어떻게든 참고 견디면서 ‘아이들 키워놓고’ ‘은퇴하고 난 뒤’로 미루다 일도 삶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베이비붐 세대에 대한 반감도 실행력에 힘을 보탰다. 공병호 공병호연구소 소장은 “가까이 있는 부모 세대를 보고 ‘지금 못 하면 나중에도 못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라며 “틀에 박힌 것을 향한 거부감과 실패해도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기성세대와의 큰 차이”라고 말했다.

소규모 출발, 열린 투자

‘이런 게 돈이 될까’ 싶은 아이디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용기를 낸다. 취미를 배달해주는 하비인더박스의 조유진 대표(29)와 읽을 만한 책을 골라주는 사적인 서점의 정지혜 대표(30)가 여기에 속한다. 하비인더박스는 한 달에 한 번 취미키트를 보내주는 서비스를 한다. 설명서와 조립 영상도 포함돼 있다. 가죽 필통 만들기, 네온사인 장식, 드립커피 내리기 등 제공하는 취미는 다양하다.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예약 손님만 받는 사적인 서점에서는 책을 주인이 골라준다. 정 대표는 책을 통해 치유받은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서점을 차렸다. 상담을 거쳐 1주일 뒤 ‘처방’된 책을 배송해준다.

덕업일치, 덕질과 직업이 일치했다
장수한 대표처럼 일정 기간 직장생활을 경험한 뒤 창업을 택했다는 것은 이들의 공통점이다. 조 대표는 교직원이었고 정 대표는 출판사 편집자였다. 컵밥크루 멤버들은 치기공사와 회사원으로 일했다. 비자발적 ‘은퇴’가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으로 제2의 인생 문을 연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들은 자금 조달 창구도 다르다. 직장생활 기간이 짧고, 모아둔 돈이 적기에 일단 사업은 작게 시작한다. 그리고 투자를 받는다. 은행 대출이나 부모 지원이 아니라 크라우드펀딩 등을 애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반려묘를 키우면서 고양이 용변을 치워주고 모래를 바꿔 채워주는 자동 화장실 ‘라비봇’을 개발한 노태구 대표(31)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와디즈를 통해 2억7000만원을 모았다. 20~30대 여성 독자에게 인기를 얻으며 올해 10만 부 넘게 팔려나간 백세희 작가(28)의 베스트셀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도 시작은 크라우드펀딩이었다. 신혜성 와디즈 대표는 “투자할 때도 가치 또는 의미를 중시하는 것이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이라며 “이들이 주체가 된 크라우드펀딩은 자금을 모집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취향을 반영한 문화를 형성하고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가는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 덕업일치

덕질과 직업이 일치했다는 의미. 관심사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