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작품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아일린 그레이의 ‘드래건 안락의자’.
디자인 작품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아일린 그레이의 ‘드래건 안락의자’.
프랑스 실용 디자인 대가 장 프루베의 가구, 독일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책장, 덴마크 디자이너 한스 웨그너의 스칸디나비안 테이블과 의자, 핀란드 모던 건축 선구자 알바 알토의 가구, 스페인의 대표적 산업디자이너 하이메 아욘의 의자, 최병훈 전 홍익대 학장이 제작한 목조형 가구…. 국내외 유명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이런 가구는 예술품일까, 사치성 소비재일까.

정부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감상용 예술가구에도 소비재 고급 가구처럼 사치품으로 간주해 개별소비세(개소세)를 물리고 있어 미술계에 ‘비상등’이 켜졌다.

12일 미술계에 따르면 국세청은 고율과세 대상 고급 가구에 디자인 작품까지 포함시켜 점당 500만원(세트는 800만원) 초과분에 대해 28%의 개소세(농특세·교육세 포함)를 부과하고 있는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예술가들의 작품일지라도 불요불급한 고가 물품인 데다 용도상 일상 소비재처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게 국세청의 입장이다. 세 부담의 역진성을 보완하거나 특정 품목의 소비 억제 같은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도입한 개소세의 적용 범위를 예술품까지 확대한 만큼 논란이 예상된다. 정부는 그동안 고급가구 외에 자동차, 보석, 고급시계, 고급가방, 융단, 고급모피, 골프장 등에 종가세 방식(상품 가격을 기준으로 세금 부과)으로 개소세를 물려왔다.

◆작가들의 예술을 사치품으로 간주

디에고 자코메티의 ‘그레이 하운드와 컵, 사냥개 그리고 개집이 있는 낮은 테이블’.
디에고 자코메티의 ‘그레이 하운드와 컵, 사냥개 그리고 개집이 있는 낮은 테이블’.
디자인 작품에 대한 세금 부과로 화랑과 미술품 경매회사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2013년부터 6000만원 이상 작고 작가 작품(그림, 조각)의 양도차익을 기타소득으로 분류해 지방세를 포함, 22%의 세금을 부과한 상황에서 디자인 가구에도 세금을 물려 가뜩이나 어려운 미술시장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디자인 작품의 소장 가치와 판매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시점이어서 자칫 과세가 디자인산업 발전을 막을 수 있다”며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은 디자인시장 활성화를 위해 전문 페어(장터)를 유치하고, 앞다퉈 디자인미술관 건립을 지원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최윤석 서울옥션 상무도 “미술품 경매회사 소더비를 비롯해 크리스티, 필립스 등은 유명 디자이너 가구 작품을 모은 테마 경매를 열고 있고, 세계 최대 ‘미술장터’ 아트바젤과 마이애미 아트바젤에서도 디자인 분야만 따로 떼어 행사를 치른다”며 “세금 부과보다 시장 활성화와 지원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작가들 역시 고민이 커지고 있다. 작품을 시장에 내놓아도 당장 높은 세금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애호가들이 구입을 꺼릴 수 있어서다. 이렇게 되면 디자인 전시회는 자취를 감추고, 밀수 형태로 은밀하게 거래하는 ‘블랙마켓’이 생겨날 공산이 커진다.

옻칠 가구 작가로 유명한 김영준 씨는 “빈티지 디자인 가구를 순수 예술이 아니라 단순 소비재로 인식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며 “정부가 과거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을 일반 TV 상품으로 간주해 과세하려 했던 것과 비슷한 꼴”이라고 지적했다.

◆정부 인식 부족도 과세에 한몫

디자인 가구에 대한 정부의 인식 부족이 결국 과세로 연결됐다는 게 미술계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문화산업 위축과 수많은 작가의 생계를 무시하고 세수에만 신경쓰다 보니 예술품을 ‘사치품’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소장과 감상을 위해 제작된 디자인 가구는 일상 소비재와 달리 시간이 경과할수록 희소성 때문에 가치가 올라가는 특성이 있다”며 “미술관 전시 등 순수 예술로 인정할 만한 근거가 있는 작품은 선별적으로 비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디자인 가구에 대한 소장 붐이 일면서 국제시세도 오르는 추세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동생인 디에고의 작품 ‘그레이 하운드와 컵, 사냥개 그리고 개집이 있는 낮은 테이블’은 작년 3월 크리스티 파리 경매에서 180만2500유로(약 23억원)에 낙찰돼 눈길을 끌었다. 앞서 2009년에는 아일랜드 출신인 근대 디자인의 선두주자 아일린 그레이의 ‘드래건 안락의자’가 경합 끝에 추정가보다 10배나 많은 2190만유로(약 422억원)에 팔려 디자인 작품 세계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