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현대사 성찰한 기념비적 소설 '광장' 204쇄 찍으며 사랑받아
주인공 "중립국" 선택 장면 압권…후배 문인·독자들에 큰 영향
최인훈 타계…한국문학 '광장' 연 거목 쓰러지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중립국." (소설 '광장' 중)
23일 세상을 떠난 작가 최인훈(1934∼)의 기념비적 소설 '광장'에서 가장 결정적인 이 대목은 수많은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남한 사회와 북한 사회를 모두 경험하고 개인의 자유(밀실)와 집단적 가치(광장)라는 양극단의 사회상을 회의한 주인공 '이명준'은 한국전쟁 중 포로로 잡힌 뒤 어느 이데올로기도 지배하지 않는 중립국을 택한다.

이 소설은 남-북 간의 이념-체제에 냉철한 균형감각을 견지하면서 치열한 성찰을 보여주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에 천착하는 결말로 당대 독자들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또 삶의 일회성에 대한 인식이나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 간의 긴장과 갈등, 인간 자유의 문제와 사랑과 같은 본질을 다뤄 세월이 흘러도 젊은이들에게 늘 추앙받았다.

특히 소설의 열린 구조가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무수한 비평가와 독자들을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렇게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최인훈 작가는 문학에만 몰두한 그의 삶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 역사와 다르지 않다고 할 정도로 한국문학의 거목(巨木)이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발발로 월남한 그는 전후 전근대적인 상황과 양대 이데올로기의 틈새에서 부딪치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자 치열하게 고뇌했다.

다채로운 형식의 소설과 희곡, 평론, 에세이들을 발표하며 한국 현대문학의 테두리를 확장했다.

그의 문학 세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낡지 않은 문제의식과 세련된 양식의 전범으로 평가받는다.

문학계는 그를 "근대성에 대한 관심,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새로운 형식의 탐구를 바탕으로 '신이 죽은 시대, 신화가 사라진 시대에 신비주의와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의 방법론으로 개발한 내면성 탐구의 절정에 선 작가", "문학작품을 썼다기보다 차라리 '문학을 살았다'라는 표현에 적실한 작가"로 평한다.

불세출의 문학평론가 김현은 일찍이 그를 두고 "뿌리 뽑힌 인간이라는 주제를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확대시킨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상찬한 바 있다.

그가 4·19 이후 1960년대 벽두에 발표한 '광장'은 당대 지식인과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줬고,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읽히며 후배 문인과 젊은 독자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항대립을 극복하려는 한 개인의 역정은 반세기가 넘도록 여전한 분단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최인훈 타계…한국문학 '광장' 연 거목 쓰러지다
이 소설은 출간 이후 현재까지 통쇄 204쇄를 찍었고,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최다 수록 작품이라는 기록도 있다.

2004년 국내 문인들(시인·소설가·대학교수·평론가 등)이 뽑은 '한국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광장'은 완벽을 추구하는 작가가 스스로 수차례 다듬고 개작해 한국문학사상 가장 많은 판본을 지닌 작품으로 알려졌다.

작가는 1961년판 서문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고 설명했다.

2008년 등단 50주년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4·19는 역사가 갑자기 큰 조명등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비춰준 계기였기 때문에 덜 똑똑한 사람도 총명해질 수 있었고 영감이나 재능이 부족했던 예술가들도 갑자기 일급 역사관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라며 자기를 낮추기도 했다.

'광장' 이후에도 그는 인간과 시대를 통찰하는 많은 작품을 썼다.

전망이 닫힌 시대의 존재론적 고뇌를 그린 '회색인',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파격적 서사 실험을 보인 '서유기', 신식민지적 현실의 위기의식을 풍자소설의 기법으로 표현한 '총독의 소리' 연작, 20세기 자체를 전면적으로 문제 삼으며 동시대인의 운명을 큰 시각에서 조망한 대작 '화두' 등이 대표작이다.

많은 문학청년이 그의 영향을 받아 작가로 나설 수 있었고, 연구자들은 그의 작품을 토대로 진지한 연구와 평론의 세계를 열정적으로 열어갈 수 있었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는 1976년 '최인훈 전집'을 정리하여 발간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15권을 냈다.

문학과지성사 측은 2008년 이 전집 신판을 내면서 "생존 작가의 전집이 이렇듯 오랜 기간 판과 쇄를 거듭하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판형으로 제작돼 독자 앞에 선보이는 일은 우리 문학사에서 일찍이 어느 작가도 경험하지 못한 유례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최인훈 타계…한국문학 '광장' 연 거목 쓰러지다
그는 2003년 계간지에 발표한 단편 '바다의 편지'를 끝으로 새 작품을 내지는 않았다.

2008년 기자들에게 "한 권 분량의 새 작품집을 낼 만한 원고를 갖고 있다"며 "말로 무언가를 적는 것이 마음대로 가자고 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실험한, 심미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작품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듬해 자신의 희곡 작품을 올린 연극 공연을 보러 와 관객과 만난 자리에서는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은퇴란 없다.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해 식지 않는 창작열을 드러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돌연히 찾아온 암을 이기지 못하고 신작을 세상에 내보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