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Getty Images Bank
“가격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전문가들은 1000달러 이하로 정하라고 하는데 그 말은 999달러로 하라는 뜻인 것 같군요.”

2010년 1월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처음 공개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자 뒤편 스크린에 999라는 숫자가 떴다. 잡스는 “제품 생산비 목표를 공격적으로 잡았다”고 덧붙였다. 순간 999라는 숫자가 깨지면서 499라고 찍혔다.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책마을] 가격이 지배했던 자본주의, 이제 데이터로 '권력 이동'
신간 《데이터 자본주의》에서 가격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시장 효율성을 저해한 사례로 든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이다. 대부분 사람은 상품의 차이보다 가격 그 자체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여기에 먼저 솔깃하게 된다. 가격을 포함한 시장경제 요소들에 이 같은 ‘일종의 조작’을 가하면 기업을 넘어 국가 단위에서는 여파가 더 커진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그랬다. 저자들은 “비윤리적인 은행가들이 신용평가기관의 부패한 기업분석가들과 공모해 무지한 투자자에게 위험한 투자상품을 파는 동안 규제 기관은 모르는 척했던 결과”라며 “불투명한 정보와 근본적으로 잘못된 의사결정의 치명적인 결합”이었다고 지적한다. 책을 쓴 빅토르 마이어 쇤베르거 옥스퍼드대 인터넷연구소 교수는 빅데이터 전문가다. 앞서 한국에 소개된 《빅 데이터가 만드는 세상》 《잊혀질 권리》 등의 저자기도 하다. 공동 저자인 토마스 람게는 독일 경제지 ‘브란트아인스’의 기술 전문기자다.

지난 20년간의 디지털 혁신은 경제의 근본을 바꾸기 시작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를 가격으로 압축해 수세기 동안 간편하게 써왔다. 저자들은 비효율적인 화폐 기반의 자본주의가 데이터 기반으로 진화하는 현상을 파고든다. 화폐라는 단일한 척도의 숫자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알려주는 데이터가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기업은 이미 이런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책에서는 처음 온라인쇼핑에 경매 방식을 도입했지만 점차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 이베이와 차량공유사업으로 급부상한 블라블라카를 예로 든다. 블라블라카는 매달 차를 타려는 사람과 태워주려는 사람, 수백만 명을 연결해주며 돈을 번다. 여기서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의 상황에 맞는 최적의 거래 상대를 빠르고 간편하게 찾아낼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순위 정보다.

저자들은 자본이 된 데이터는 기업뿐 아니라 금융과 노동, 국가 역할과 시장의 개념까지 바꿔 놓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금융기관이 갖고 있는 거대한 힘은 데이터를 보유한 기업 및 기관으로 옮겨가고 국가는 자동화된 시장에서 위태로워진 일자리에 대응해야 한다. 데이터 혁명에 대처하기 위해 기업은 변신에 앞장서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일본 후코쿠생명과 독일의 다임러가 대표적이다. 후코쿠생명은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AI) 플랫폼 ‘왓슨’을 들여와 보험 청구를 평가하면서 관련 부서 인력의 3분의 1을 대체했다. 자동차 제조회사 다임러는 현재 여섯 단계인 의사결정 과정을 2020년까지 두 단계로 줄이는 조직구조 변화로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높이기로 했다. 저자들은 장기적으로 기업은 두 회사의 전형에서 모델을 찾아가야 할 것으로 내다봤다. 어떤 결정을 기계에 위임할 것인지를 정하고 시장의 힘을 활용해 협업하는 방식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끝없이 반복하는 비관주의만큼이나 기술 유토피아 지지자의 흥에 겨운 낙관주의도 혐오한다”고 했지만 책 전반에는 낙관의 기운이 확연하다. “컴퓨터는 인간과 다르게 인지 제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명쾌한 상태를 유지한다” “데이터가 인간의 협업을 향상시킨다” “시장의 과제는 효율성이며 풍부한 데이터를 이용한다면 더 잘 어울리는 대상을 찾을 수 있다” 등의 문장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시스템이 실수할 가능성과 그에 따른 위험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효율에 매달려 자본주의의 비인간화가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비관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박할지 궁금하다.

전체 책 분량의 15%(53쪽)를 ‘주석’과 ‘찾아보기’에 할애한 것으로 저자들의 꼼꼼함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내용의 밀도가 높고 문체가 딱딱해 단숨에 읽기는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런 측면에서 원서에는 없지만 출판사 측에서 추가한 ‘중간 제목’이 각 장을 적절하게 나눠주면서 제 역할을 했다.

책의 감수를 맡은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과 저자의 대담을 추가한 것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대담을 책의 제일 앞으로 배치한 것은 욕심 아니었을까. 대담을 통해 전문가가 나서 쟁점을 짚어주는 좋은 기획이지만 책의 목차도 보기 전에 마주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