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20> 연평도

풍어의 추억 아련한 '황금의 섬'
연평도 조기박물관 앞 절벽, 일명 나바론의 언덕이라 불린다. 작은 사진은 어선들이 가득한 1960년대 조기 파시.

연평도 조기박물관 앞 절벽, 일명 나바론의 언덕이라 불린다. 작은 사진은 어선들이 가득한 1960년대 조기 파시.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세/연평바다에 널린 조기/양주만 남기고 다 잡아 들이자/연평장군님 모셔 싣고/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세”(연평도 배치기 소리)

“옛날에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어.” 섬이나 포구에 가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번성하던 과거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려니 생각했었다. 잘나가다 지금은 쇠락한 섬이나 포구 사람들은 그 시절의 무용담이 나오면 날이라도 샐 기세였으니. 그런데 개가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그 목격담을 처음 들은 곳은 연평도다. 지금은 남북 분단의 한가운데 화약고 같은 섬. 남북한 정상회담 전까지만 해도 언제 포탄이 날아올지 몰라 불안하게 살던 분쟁지역의 한미한 섬에 불과하지만 한 시절 연평도는 황금의 섬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골드러시 때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갔듯이 이 땅의 골드러시 때 사람들은 돈을 찾아 연평도와 흑산도 같은 서해의 섬으로 몰려들었다.
옛 파시 때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르신들.

옛 파시 때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르신들.

개도 돈을 물고 다니던 황금의 섬

오죽했으면 ‘돈 실러 가자’는 노래까지 생겼을까. 서해 바다에 돈이 지천으로 깔리던 시절. 그 한가운데 연평도 파시가 있었다. 봄 파시 철이면 연평도 어업조합 출납고가 한국은행 출납고보다 더 많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연평도 어업조합 전무하지 황해지사 안 한다’고 할 정도로 권세가 드높던 섬이기도 했다. 그것이 다 연평도가 황금의 섬이었던 까닭이다. 파시 때면 종이보다 흔한 것이 돈이었다. 그래서 어부들이 술에 취해 길을 가다 급하게 변이라도 보고나면 화장지가 없으니 돈으로 뒤를 닦는 일도 흔했다. 그 똥 묻은 돈 냄새를 맡고 개들이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 선주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돈다발을 물고 다니는 개도 있었다.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 연평바다로 ~

연평도를 황금알 낳는 거위로 만든 것은 조기떼였다. 해마다 봄철 연평바다에 조기떼가 몰려오면 연평도에는 파시가 섰다. 서해안 3대 파시로 흑산도, 위도, 연평도 파시가 꼽히는데 조기떼를 따라 흑산도에서 위도로 또 연평도로 이동해 가며 열리던 파시였다. 파시란 비유하자면 텅 빈 해수욕장에 여름 성수기가 되면 온갖 임시 상점이 들어서고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본래 파시의 의미는 ‘바다 위의 시장’을 말한다.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 연평바다로 ~

주로 떼를 지어 이동하는 회유성 물고기인 조기나 고등어, 삼치, 부서, 병어 같은 물고기들 때문에 생기던 임시 해상 시장이다. 성어기가 되면 어선들이 어장으로 몰려들고 어선들로부터 물고기를 사러온 중개상들과 어선에서 필요한 생필품, 어구들을 팔러온 상선들이 뒤엉켜 시장이 형성됐다. 그런데 어선과 상선이 많아지고 어획량이 늘어나면서 해상 시장이 차츰 어장 근처 섬이나 포구 등으로 옮겨갔다. 해상 시장은 어판장과 선구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숙박시설, 각종 기관 등까지 갖춰진 임시 촌락으로 발전했고 어업 전진기지 역할을 겸했는데 그것이 연평도나 흑산도 같은 파시였다. 어선들은 산란장과 먹이를 찾아 회유하는 어류들을 쫓아다니며 잡았고 상인들은 그 어선들을 쫓아가며 장사를 한 것이 파시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조기파시로 불야성 이루던 곳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 연평바다로 ~

조기파시가 열리는 두 달 남짓 동안 연평도는 불야성을 이루다 파시가 끝나면 순식간에 또 한적한 어촌이 됐다. 연평도에서는 해마다 해상도시가 생겨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던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영광의 ‘파시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택리지》에도 선유도 해상 시장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파시의 역사는 길다. 1800년대 중반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조기잡이 선단이 연평도로 몰려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평도 조기파시는 조선시대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소규모 파시가 근대 들어 어업기술의 발달로 대규모 파시로 성장했고, 대규모 파시가 열리던 기간만도 70여 년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평도를 찾았으며 얼마나 많은 돈이 연평도를 거처 흘러가고 흘러 왔으며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깃들었던 것일까!
연평도항 가는 길. NLL 안에 있는 섬답게 군사적 긴장감이 흐른다.

연평도항 가는 길. NLL 안에 있는 섬답게 군사적 긴장감이 흐른다.

1910년 연평도에는 300여 척의 조기잡이배가, 1936년에는 2000여 척의 어선과 운반선, 상선들이, 파시가 절정에 달했던 1943년에는 무려 5000여 척의 배가 연평도 앞바다를 꽉 채웠다. 1944년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97억 마리, 1946년에는 297억 마리였다. 1947년 파시 때는 연인원 9만여 명이 연평도로 들어와 조업을 하고 상품을 사고팔며 연평도를 누볐다. 그야말로 서해바다의 오디세이였다.

아리까리란 지명 또한 파시의 유물이다.

아리까리란 지명 또한 파시의 유물이다.

물고기를 잡는 것은 어부들이었지만 연평도 파시의 꽃은 어부가 아니었다. 물새라 불리던 작부들이었다. 조기떼 우는 소리가 들리면 돈 냄새를 맡은 업주들이 가장 먼저 작부들을 싣고 달려와 술집을 차렸다. 대다수 어부들은 바다에서 어렵게 번 돈을 술집에서 탕진했다. 일제강점기 연평도 조기파시에는 일본 기생들까지 들어왔다. 1936년 연평파시에 신고 된 요리점은 300개, 음식점 53개, 카페 1개, 이발관 9개, 목욕탕 3개, 여인숙 5개, 대서소가 2개였다. 노점들은 등록도 되지 않았으니 상점 수는 그 몇 배나 됐을 것이다. 등록된 작부는 95명, 예기는 5명이었다. 1930년대 어느 해 조기파시에는 일본인 기생이 50명, 조선인 작부가 150명이었다. 1947년에는 등록된 작부만 400여 명이었다. 등록되지 않은 작부까지 합하면 적어도 500명 이상의 작부가 두 달 동안 연평도에 상주 하다 떠났다. 1947년 연평도 인구가 3000여 명이었으니 파시철 연평도가 얼마나 흥청거리는 환락의 섬이었을지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조기를 대신해 연평도 특산물이 된 꽃게.

조기를 대신해 연평도 특산물이 된 꽃게.

색주가에서는 어부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일도 예사였다. 고된 어로 끝에 뭍으로 들어와 작부들과 마시는 술은 달콤했다. 정신없이 마시다 그대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다음날 아침 계산을 할 때 색주가 주인들은 빈병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바가지를 씌웠다. 빈병에는 거미줄까지 처진 것도 있으니 누가 봐도 사기였다. 그래도 별수 없으니 속는 줄 알고 속는 것이 파시 때 풍경이었다. 그래서 연평도에서는 파시(波市)를 작사(作詐)라 했다. 거짓을 짓는다는 뜻의 작사. 사기가 판치는 무대가 작사판이었다. 오죽했으면 1947년 동아일보 기사에까지 연평도의 바가지 문제가 보도됐을까. “소주 한 되에 1000원, 쌀 한 말에 680원, 고물가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동아일보 1947년 5월23일)

연평 바다 조기 사라지며 파시도 소멸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풍성한 연평도 섬밥상.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풍성한 연평도 섬밥상.

동해안 축산항의 오징어파시, 청산도의 고등어파시 등 동서남해 모든 바다에서 다양한 파시가 섰으나 파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조기 파시였다. 한 시절 서해바다는 조기 반 물 반이었다. 2월 하순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군단이 흑산도 바다에 나타나면 흑산도 파시가 섰고 북상한 조기떼가 칠산 어장에 도착하는 4월이면 상인들도 이동해 부안군 위도에 파시를 열었다. 5월이면 연평도 파시가 뒤를 이었다. 그 찬란하던 연평도 파시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연평도 북쪽으로 어선들의 항해를 금지하는 어로저지선(어로한계선)이 생기고 오랜 세월 지나친 남획으로 연평 바다에 조기의 씨가 마르게 되면서부터다. 세상은 본디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히 풍족한 곳이지만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는 언제나 모자란 곳이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어로 저지선이 생긴 1968년 무렵부터 연평 바다의 조기들도 자취를 감추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멸족의 위험을 느낀 조기들이 더 이상 회유하지 않고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연평 파시도 역사의 저편으로 소멸하고 말았다. 지금 연평도에는 파시의 시대를 증명해줄 흔적 하나 없다. 연평도 포격 사건 전까지 남아있던 유일한 파시 유물인 연평어업조합 건물(1930년대 건축)마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번듯한 수협 건물이 들어섰다. 그토록 소중한 역사 유물을 그토록 쉽게 철거해 버리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종 때도 연평도 특산물로 조기가 등장

연평도가 조기잡이의 메카가 된 것은 임경업 장군과 관련이 깊다. 전설에 따르면 1634년 의주 부윤이던 임경업이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가던 중 연평도에 정박했다. 그때 임장군이 식량 조달을 위해 병사들로 하여금 가시나무를 베어다 안목 바다에 꽂아놓게 했는데 물이 빠지자 수많은 조기가 가시에 꽂혔다. 이 일을 계기로 임경업은 서해 바다 조기의 신으로 등극했고 연평도에도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생겼다. 물론 임경업이 연평 사람들에게 조기 잡는 법을 알려줬다는 것은 만들어낸 이야기다. 이미 임경업 이전 시대인 세종실록 지리지에 연평도 특산물로 조기가 등장하고 중종실록에는 어전을 둘러싼 다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민들은 위험한 바다에서 의지할 존재가 필요해 임경업 장군을 신으로 떠받들고 모셨다.

지금은 인천 옹진군 소속이지만 본래 연평도는 황해도 해주에 속했었다. 인천에서 연평도까지 거리는 122㎞나 되지만 해주는 30㎞ 거리에 불과하다. 북한 땅인 대수압도, 소수압도 같은 섬들도 본래는 연평도와 같은 행정구역을 이루고 있었다. 연평도는 대연평과 소연평 두 개의 섬을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인데 대연평도라고 해봐야 가로 3.7㎞, 세로 2.7㎞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이 작은 섬이 과거에는 서해바다 황금시대를 일군 어업역사의 큰 족적을 남겼고 해방 이후에는 한반도 분단의 상징이었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폭격을 당한 집들 대부분은 철거됐으나 몇 채는 ‘안보관광’용으로 허물지 않고 ‘전시’ 중이다. 부서진 집들은 처참하다. 주민들은 아직도 그날의 악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다시 남북 화해와 상생의 시대가 시작됐다. 연평도는 이제 어떤 섬으로 자리매김될까. 인간의 탐욕으로 사라져버린 조기떼가 연평도로 다시 돌아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가 정착한다면 연평도는 또 다른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연평도가 남북 평화를 상징하는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 연평바다로 ~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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