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취약(脆弱)했다. 아테네는 그 안에 다양한 인종들과 민족들이 모여 살면서 가족이나 친족 단위 중심의 공동체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런 갈등은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이 걸림돌은 길가에 숨겨져 있다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을 넘어뜨린다. 이 걸림돌을 그리스어로 ‘스칸달론(skandalon)’이라고 부른다. ‘스캔들(scandal)’ 즉 ‘추문(醜聞)’이란 단어의 어원이다.

이런 추문이 종종 들리는 사회는 취약하다는 증거다. 민주주의의 기반인 ‘숙고(熟考)’를 소홀히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단점과 장점을 깊이 숙고하는 자만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미래를 숙고할 능력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아테네라는 공동체는 이 취약점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 비극이라는 시민 정화의례(淨化儀禮)를 거행했다.

스핑크스보다 더 끔찍한 괴물 ‘나’

앙투안 드니 쇼데(1763~1810)의 ‘목동과 오이디푸스’(82×75×196㎝).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앙투안 드니 쇼데(1763~1810)의 ‘목동과 오이디푸스’(82×75×196㎝).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다스리는 강력한 리더다. 그는 또한 아폴로 신전 앞에 시급한 탄원을 위해 모인 시민 대표들을 만나러 몸소 나올 정도로 자비롭다. 《오이디푸스 왕》의 첫 부분인 ‘입장가’(1~151행)는 오이디푸스와 테베의 사제, 그리고 델피에서 신탁을 받아온 오이디푸스의 처남인 크레온이 주고받는 대화다. 테베 시민들은 양털실을 감아 맨 나뭇가지를 들고 향연(香煙)으로 가득한 신전에 들어와 무엇인가를 탄원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그들에게 다가와 자신을 소개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명성이 자자한 오이디푸스가 몸소 왔다.”(8행) 그는 호메로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처럼 “나는 오디세우스다. 나의 명성이 하늘에 닿았다”(《오디세이아》 9장19행)고 단호하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에서 역병을 일으키는 괴물 스핑크스를 살해해 고대 그리스 영웅의 최고 가치인 명성(名聲)을 획득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단어는 오이디푸스의 심리적 혼란을 표시한다. 오이디푸스는 ‘남들에게는 명성을 지닌 영웅’이지만 정작 자신은 모든 비밀을 간직한 ‘퉁퉁 부은 발’을 매일 보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미몽에 빠져 있는 비극적 영웅이다.

탄원자들의 대표인 사제는 테베의 모든 연령층의 대표들이 전부 모였다고 말한다. “당신의 제단에, 일부는 날기에 아직 너무 연약한 어린 것들이며, 일부는 나이가 들어 몸이 꾸부정한 저처럼 제우스 사제들이고, 일부는 선택된 젊은이들입니다.”(16~19행) 이 문장들은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던진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사제들은 스핑크스가 테베에 가져온 역병보다 더 심한 역병이 창궐하는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스핑크스보다 더 큰 ‘괴물’이 테베의 역병을 일으켰다고 믿는다. 이 재해의 원인은 스핑크스처럼 외부가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테베 내부의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테베인들은 테베의 제단, 시장, 아테네 여신을 위한 두 신전, 아폴로 신탁을 위한 신전 등을 통해 도시 문명의 혜택을 누려 왔다. 그러나 역병 때문에 도시가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 사제들은 “만일 성벽도 배도 텅 비어 그 안에 같이 살 사람이 없다면 폐허(그리스어 ‘에레모스’)가 될 것”(56~57행)이라고 한탄한다. 에레모스(eremos)는 ‘버려진 땅’ ‘목동에 의해 버려진 가축’ 혹은 ‘남편에 의해 버려진 아내’라는 의미다. ‘도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폴리스’가 ‘질서’를 의미한다면 에레모스는 ‘혼돈’이다. 플라톤은 우주 창조를 기록한 《티마에오스》에서 장소를 세 구역으로 구분한다. ‘도시(폴리스)’와 ‘경계(코라)’, ‘버려진 땅(에레모스)’이다.

오염(汚染)

테베를 덮친 역병… 원인은 도시를 '오염'시킨 살인자에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폐허’라는 야만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테베를 다시 질서로 편입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크레온은 델피에 가서 아폴로로부터 받은 신탁을 가져온다. 오이디푸스는 이성적이고 자비로운 왕으로서 그 신탁에 근거해 역병의 원인을 추적하고 제거한다. 오이디푸스의 문제 해결 능력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역병을 멈추게 할 정도로 탁월했다. 크레온은 델피에서 돌아와 다음과 같은 신탁을 전한다. “제가 신으로부터 들은 것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포에부스(아폴로의 별칭)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으로부터 오염을 내쫓아라. 그것을 더 이상 품지 말라. 치유할 수 없을 때까지 양육되지 않도록 근절하라!’”(95~98행)

‘오염’으로 번역된 그리스 단어 ‘미아스마(miasma)’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전염시키다’라는 동사 ‘미아이네인(miainein)’에서 파생된 미아스마는 ‘얼룩·오염’이란 의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살인죄를 ‘공기 중 바람으로 퍼지는 오염’으로 규정했다. 살인한 사람이 한 공동체에 계속 거주할 경우 살인이란 범죄가 다른 사람에게 오염돼 또 다른 살인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역병이 한 개인의 살인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간이 도시라는 문명을 구축하고, 야만에서 양육의 단계로 진화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도시는 다시 문명을 파괴하는 ‘오염’을 ‘양육’하고 있었다.

정화(淨化)

오이디푸스는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다. “어떤 정화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런 일을 초래한 장본인은 누구인가?” 정화라고 번역된 그리스 단어는 ‘카타르모스(katharmos)’다. 정화는 도시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문명을 구축하고 문화를 누리려는 시민들의 수행이다. 카타르모스는 원래 의학용어다. 여성들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며 매달 몸 밖으로 출혈하는 생리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테베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이 알 수 없는 장소이지만 필수불가결한 장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 공연은 도시라는 정치적인 공동체의 공공의례라고 정의한다. 비극은 그 공동체가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취약한 상황에 좀 더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위한 정치적인 장치다. 카타르모스는 개인적 차원에서 군더더기와 같은 감정들을 유기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녕을 위해 그 취약성을 제거하는 행위다. 건강한 도시는 그 안에 존재하는 취약한 사람들, 취약한 지역들, 취약한 개념들을 솜씨 있게 다룰 때 유지된다.

카타르모스는 단순하게는 테베란 도시 안에 존재하고, 유기해야만 하는 불순물에 대한 정화다. 나아가 건강한 도시가 되기 위해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취약하고 숨기고 싶은 과거를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심지어는 제거하려는 노력이다. 테베는 카타르모스를 통해 안정된 도시로 재조정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테베는 그 안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취약한 과거라도 포용할 수 있는 자아의 확장을 연습한다. 여성들이 ‘월경’이란 경계를 통해 새로운 생명 탄생에 대한 희망을 품듯이, 테베는 이 과정을 통해 다시 태어날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그 정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살인을 저질러 테베라는 취약한 도시에 ‘오염’을 초래한 장본인을 찾아 나설 것이다.

신탁(神託)

크레온이 오이디푸스 질문에 신탁으로 대답한다. “사람을 추방하거나 피를 피로 갚으라 하셨습니다. 바로 그 피가 우리 도시에 폭풍을 가져왔습니다.… 주인이시여! 당신이 이 도시를 치리하시기 전에 우리 땅의 통치자는 라이오스였습니다.”(100~104행)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라는 이름을 듣자 “내가 그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나는 그를 지금까지 본 적은 없지”라고 말한다. 원형 극장에 모인 아테네인들은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란 사실을 다 안다. 정작 이 공연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생부를 알지 못한다. 이들은 서로 단서를 통해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추적한다.

테베를 덮친 역병… 원인은 도시를 '오염'시킨 살인자에 있었다
사람들이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찾지 못한 이유는 곧바로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테베에 재앙이 덮쳤기 때문이다. 운명의 목소리는 델피에서 전해오는 아폴로의 신탁이다. 아폴로는 라이오스에게 “너의 아들이 너를 살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이디푸스에게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란 신탁을 내린다. 아폴로는 이번엔 크레온에게 “라이오스의 살인자가 색출되고 추방되면 테베의 역병이 멈출 것”이라는 신탁을 준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델피에서 신탁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왕족이나 평민들은 신이 내린 결정은 반드시 이뤄진다고 믿었다.

신탁을 내리는 자는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로다. 나는 오이디푸스처럼 남들은 다 알고 있지만, 나 혼자 모르고 있는 취약한 ‘오염’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정화하거나 해소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