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 너무 뜨거운 사회… 온도 낮춘 콘텐츠에 끌리다
30대 직장인 A씨는 토요일 오전 침대에 누워 베스트셀러가 된 에세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책장을 넘기고 있다.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나다운 삶을 살겠다는 작은 다짐을 해본다. 책을 덮고선 다리 찢기 등 스트레칭책과 영상도 보며 집에서 운동을 한다. 샤워를 한 후엔 나영석 PD의 tvN 예능 ‘숲속의 작은 집’ 주문형비디오(VOD)를 보며 고즈넉한 곳을 찾아 혼자만의 공간에서 사는 상상도 해본다.

요즘 일반 직장인들의 얘기다. A씨가 함께한 콘텐츠는 과거와 다르다. 정치나 사회문제를 설명하려 하거나, 대단히 위대한 인물을 다룬 콘텐츠가 아니라는 점에서다. 거대하고 복잡한 이야기보다 일상생활에 가깝고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콘텐츠를 더 선호한다. 시장에서도 ‘온도’를 살짝 낮춘 콘텐츠와 공간들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담론의 시대가 가고 생활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하면 과언일까. 아니다. 이런 시대의 심리는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잘 나타난다. 올 상반기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목록엔 《곰돌이 푸, 행복은 매일 있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등 에세이나 시가 대부분이었다. 30위권 안에 든 책 중 정치 분야는 한 권뿐이었고, 경제·경영 분야는 아예 없었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올 상반기엔 ‘숲속의 작은 집’뿐만 아니라 KBS ‘나물 캐는 아저씨’ 등 자연 속에서의 일상을 즐기는 예능이 나왔다. 오는 25일에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풀 뜯어 먹는 소리’가 tvN에서 처음 방영된다.
tvN 예능 ‘숲속의 작은 집’
tvN 예능 ‘숲속의 작은 집’
2~3년 전부터 이런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익숙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 콘텐츠를 많이 접한 이들이다. 일본 콘텐츠 대부분은 철저히 개인의 일상을 파고든다. 상사와의 관계나 퇴사를 다룬 회사생활 콘텐츠, 쓸모없는 가구 등을 버리는 미니멀리즘 열풍이 분 것도 일본이 먼저였다.

전문가들은 경제 구조가 일본과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일본처럼 경제가 저성장기에 접어들며 ‘사토리 세대’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토리는 ‘득도(得道)’라는 뜻으로, 일본의 장기 불황을 겪으며 큰 욕심을 버리고 소소한 삶에 만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198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난 20~30대가 해당된다.

하지만 이 분석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는 사람들도 많다. 이 정서엔 절망의 코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절망만으론 적극적 행위가 일어날 수 없다. 일상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은 작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을 쏟는 적극적 행위에 해당한다. 절망만으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란 능동형의 트렌드가 탄생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대중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식으로 사고의 전환을 이루고 있는 건 아닐까. 빠른 경제 성장과 함께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으로 사고하며 사회적 논쟁에 동참해 온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사색하는 삶)’를 선호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비타 콘템플라티바는 시간의 여백을 두고 내면을 성찰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말한다.

이런 사고가 곧 정치적, 경제적 무관심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시시각각 쏟아지는 뉴스를 끊임없이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인들과 사회적 이슈를 자주 얘기하기도 한다. 다만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땐 자신을 들여다보고 일상을 즐기고 싶어 하는 반대심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너무 뜨거워져 버린 사회, 온도를 살짝 낮춘 콘텐츠는 고대 그리스처럼 사색을 통한 경제·문화적 번영으로 향해가는 작은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