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성 화백이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2015년 작 ‘소시장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황영성 화백이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2015년 작 ‘소시장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천재 화가 이중섭(1916~1956)은 한국인에게 각별한 대상이었던 소의 특성을 강하면서도 우직하게 묘사했다. 그에게 소 그림은 강인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일제 강점기의 울분을 토해내는 창(窓)이었다. 조선대 부총장과 광주시립미술관장을 지낸 원로 작가 황영성 화백(77)의 작품에서도 소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한집에서 살았던 소에 대한 추억을 다채로운 색채와 특유의 기호화된 형태로 그려냈다. 그가 50년 동안 고집스럽게 화제(畵題)로 삼아온 ‘소 그림’은 참신성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나폴리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독일 드레스덴 미술관, 프랑스 생테티엔 현대미술관, 베이징 금일미술관, 상하이 히말라야미술관 등에 초대됐다.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오는 27일까지 여는 황 화백의 개인전은 이색적인 화법으로 소에 대한 향수와 가족의 정이 어떻게 융화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전시장 1, 2층에는 서로 몸을 부딪치며 낮고 긴 울음을 터뜨리는 검은 소, 시끌벅적한 우시장, 큰 눈을 끔벅이는 황소, 살구꽃이 핀 고향집 등 어린 시절의 삶터에서 건져 올린 ‘소의 침묵’과 ‘가족 이야기’를 담은 30여 점이 걸려 있다.

6일 전시장에서 만난 황 화백은 “달구지와 쟁기를 끌었던 소는 가족 같은 존재”라며 “소를 팔아 자녀의 대학 학비를 댔다는 데서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말했다.

“우리가 자랄 때는 소가 사람과 한집에서 살았어요. 외양간이 붙어 있었으니까 소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하죠.”

1941년 강원 철원 월정리에서 태어난 그는 난리 통에 옮겨온 광주광역시를 평생 터전으로 삼고 살아왔다. “철원에서 아홉 살까지 살다 전쟁이 나는 바람에 광주로 내려왔어요. 나중에 다시 찾아가 보니 제가 태어난 곳은 없어졌더군요. 고향이란 애틋한 그리움과 위안을 주는 동시에 추억과 여유가 숨쉬는 곳이거든요.”

1970년대 그는 초가집과 가족, 외양간에 사는 소로 인간과 동물, 자연의 공존이라는 큰 주제를 담아냈다. 1980년대에는 농촌에서 일하는 소와 농부들의 모습에서 강한 생명력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논밭의 풍경을 중점적으로 그리다 보니 녹색조의 작품을 많이 그렸어요. 일부러 하늘에서 내려다본 부감법을 사용해 논밭의 푸르름을 강조했습니다. 요즘 말하는 녹색혁명을 화면에서 먼저 시도한 셈이죠.”

1990년 알래스카에서 시작해 캐나다~멕시코~콜롬비아~페루에 이르는 ‘아메리칸 인디언 루트’를 여행한 뒤부터 그의 소와 고향, 가족 개념은 지구촌으로 확장됐다. 화면의 형식도 달라졌다. 화폭을 격자 무늬로 분할한 뒤 아이콘처럼 이미지를 배열하는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1970년대까지 좁은 의미의 가족을 의인화해 소를 그렸던 작가는 이때부터 이웃, 자연, 동식물, 숫자, 컴퓨터 등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소재를 ‘가족’의 테두리 안에 넣었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한 가족과 고향으로 파악하고 만물이 동등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화면에 풀어낸 것”이라며 “아이콘 같은 이미지 배열은 무등산에 있는 증심사의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제자들의 얼굴, 삶, 깨달음의 과정은 서로 달라도 모두 한 가족처럼 보였다는 얘기다.

그는 요즘 검은색이 지배하는 강렬한 이미지의 소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선과 면으로 단순화하는 조형적 변화도 두드러진다. 작가는 “어느 순간 검은 소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며 웃었다.

“검정이라는 건 모든 색채가 다 합쳐진 것이잖아요. 모든 욕망과 비밀, 숨겨온 것들이 이 검은색에 다 들어가 있다고 보면 돼요. 나이 여든이 되고 보니 인생에서나 작업에서나 못다 한 이야기와 표현이 많아요.”

작가는 지난해 새롭게 시도한 ‘문자-형상’ 연작도 내놓았다. 이태백, 조조, 김소월, 이용악, 정지용의 시를 빌려와 문자 그림으로 표현한 게 흥미롭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