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다이크숲의 너도밤나무 노목 아래에서 숲 일지를 쓰고 있는 리처드 포티. 소소의책 제공
그림다이크숲의 너도밤나무 노목 아래에서 숲 일지를 쓰고 있는 리처드 포티. 소소의책 제공
영국 런던 북서쪽에 80㎞ 이상 길게 뻗은 고지대가 있다. 칠턴힐스다.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멸종한 동물의 화석을 다루던 고(古)생물학자가 은퇴한 지 5년 만인 2011년 칠턴힐스에 있는 1.6㏊의 너도밤나무-블루벨숲을 사들였다. 옥스퍼드셔주 남부의 그림다이크숲이었다. 숲의 주인이 된 그는 숲을 탐사·관찰하고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죽은 동물을 다루던 그가 살아 있는 생명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자 신이 났다. 이끼 지의류 풀 곤충 버섯에 이르기까지 모두 채집했다. 너도밤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주목 등 숲에 있는 모든 것을 조사했다. 밤에는 나방을 잡고 낮에는 포충망을 들고 각다귀를 잡으며 놀았다. 그는 숲에 사는 동식물과 숲의 분위기, 계절에 따른 변화를 조그만 가죽 수첩에 깨알같이 기록했다.

[책마을] 숲을 사들인 고생물학자… 미래세대를 위해 쓴 '숲 일기'
《나무에서 숲을 보다》는 고생물학자이자 과학저술가로 유명한 리처드 포티가 이렇게 기록한 숲의 바이오그래피(biography)이자 자연사 이야기, 숲의 인문학 해설서다. 저자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문학 역사 지질학 고고학 등 광범위한 분야의 기록과 자료,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숲속 나무들이 지금까지 어떤 역사적 사건을 목격하고 어떤 밀담을 엿들었으며 나무 밑에는 누가 숨어 있었고, 밀렵꾼과 부랑자, 시인과 강도들이 숲에서 무슨 일을 했을지” 상상한다.

숲의 일상과 변화를 월별로 나눠 전개하는 그의 이야기는 차가운 1월 대신 생기 넘치는 4월부터 시작한다. 너도밤나무 새순이 나오기엔 이른 계절, 미나리아재빗과의 레서셀런다인과 제비꽃이 꽃잎을 피워내고 우드멜릭이 햇살을 받으려고 초록빛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동영상을 보여주듯 묘사한다.

“작은 우드멜릭 풀밭을 벗어나면 마침내 4월의 영국 너도밤나무숲이 선사하는 영광의 바닷가에 이른다. 블루벨의 바다다. 숲 바닥 전체가 수천수만 송이의 꽃으로 페인트칠한 것 같다.(중략) 블루벨 카펫이라 부르는 게 더 낫겠다.”

숲의 바닥에 ‘블루벨 카펫’이 깔릴 즈음 꼭대기에는 양벚나무가 동시에 만개한다. 나뭇가지마다 풍성한 잎사귀로 장식된 ‘벚꽃 부케’가 사람의 눈보다 15m 이상 높은 곳에서 백색 향연을 펼친다.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노란색 유황나비와 공작나비, 줄흰나비, 호박벌, 제니등에 같은 곤충이 제각각 비행 솜씨를 자랑한다. 또한 노래지빠귀와 굴뚝새, 유럽울새, 대륙검은지빠귀, 박새 등으로 구성된 ‘봄의 교향악단’이 일제히 연주를 시작한다. 딱따구리가 이따금 받쳐주는 타악기의 울림통 소리는 이 조류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백비트’를 깔아준다.

블루벨이 시들어가는 5월이면 양치류가 새잎을 밀어낸다. 저자는 고사리의 새순이 돋아나는 모습을 ‘바이올린 머리 같은 장식’ ‘파티 때 아이들이 시끄럽게 불어대는 코끼리나팔’과 같다고 묘사한다. 6월에는 모습도 사연도 제각각인 나방을 잡으러 나선다. 어리사과독나방 유황나방 붉은정맥나방 시골주름나방 모카나방…. 그림다이크숲에 사는 150여 종의 나방을 일일이 확인하고 분류해낸 집요함이 놀랍다. 너도밤나무에 상처를 입히는 청설모가 활개를 치는 것도 이즈음이다.

9월이면 야생화들이 씨앗을 퍼뜨리고, 너도밤나무 열매가 쏟아지는 10월은 버섯 애호가들에게 축복의 시기다. 땅속에서 귀한 송로버섯을 찾아낼 수 있고, 땅 위에선 노란애주름버섯, 갈색의 답싸리버섯, 파티용 풍선처럼 생긴 말불버섯, 땅에서 하얀 수염이 싹트는 것 같은 콩꼬투리버섯, 초록색 기와버섯 등 300종 이상이 각양각색의 ‘버섯 갤러리’를 연출한다.

저자의 세심한 관찰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숲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7~8세기 색슨족이 칠턴힐스에 정착할 무렵부터 인간과 함께해온 그림다이크숲은 농지나 풀밭으로 개간될 뻔한 위기를 몇 차례나 넘기고 용케 명맥을 이어왔다. 숲의 생존은 그 효용가치에 의해 결정된 덕분이다. 숲은 땔감과 건축자재는 물론 수레바퀴, 맥주통의 마개와 쐐기못, 의자다리, 심지어 전쟁 중에는 라이플총의 개머리판 재료도 제공했다.

저자는 “숲이 농촌경제 안에서 지속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태곳적부터 내려온 ‘반(半)자연적인’ 숲이라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숲의 미래를 염려한다. 숲을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장미정원이나 도심의 자동차공원 같은 편의시설로 바꾸고, 천연 원목 제품에 대한 관심을 다시 일으켜 숲의 효용을 늘리며, 아이들의 관심을 숲으로 돌리자고 제안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