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 대관 불허·지원 중단…'문화 검열' 의혹 사례 쏟아져
기국서 극단 76단 예술감독이 1981년 연출한 ‘햄릿’ 시리즈는 연극계의 전설이다. 군사정권 시절 사전 검열이 있을 때였다. 10·26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기 예술감독은 왕에게 검은 베레모와 검정 선글라스를, 햄릿에게는 청바지를 입혔다. ‘닭장차’가 극장 주변에 찾아왔고, 공연 직전 극장으로부터 ‘로비 사용 불가’ 통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꿋꿋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지난해 4월 기 예술감독이 서울연극제 참가작으로 선정된 연극 ‘물의 노래’를 준비할 때였다. ‘물의 노래’는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대학살을 다룬 작품이다. 서울연극제 집행위원회는 연극제 개막을 이틀 앞두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공식 참가작인 ‘물의 노래’와 극단 광장의 ‘6·29가 보낸 예고 부고장’을 공연할 예정이던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을 빌려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무대 조명시설의 구동부 이상으로 긴급 점검과 보수가 필요해 극장을 한 달여간 폐쇄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공연장 대관 불허·지원 중단…'문화 검열' 의혹 사례 쏟아져
당시 서울연극제 집행위원장을 맡은 박장렬 전 서울연극협회 회장은 27일 “지금 되돌아보니 나를 포함해 협회원 다수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데다 ‘6·29…’는 6월 민주항쟁을, ‘물의 노래’는 세월호 사태를 떠올리게 해 검열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 예술감독은 “1980년대나 지금이나 탄압 방식이 달라진 게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박원순 서울시장 지지를 선언한 인물이다.

문화계 인사 9000여명의 이름이 적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특검 수사가 한창인 가운데 각 분야 예술가와 공연에 대한 ‘검열 의혹’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굴곡진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부터 세월호 사태를 연상시키는 작품까지 ‘배제’의 이유는 다양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박경미 의원(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세종도서 선정·보급 사업 심사에서는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다룬 도서들이 다수 배제됐다. 2014년 3차 최종 심사에서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 이시백의 《사자클럽 잔혹사》,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 등이 떨어졌다. 각각 5·18 민주화운동, 김신조 사건, 6·25 전쟁 등을 다룬 작품이다. 일부 심사위원은 “다소 정치적 성향인 도서를 제외” 등의 심사 총평을 남겼다.

이윤택, 박근형 극작가 겸 연출가 등도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문예위 지원심사에서 탈락했다. 박 연출가는 연극 ‘개구리’(사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했고, 이 연출가는 지난 대선 때 고교 동창인 문재인 후보 지지 연설을 했다. 이 연출가는 “지원금 중단이라는 형태나 방식으로 바뀌었을 뿐 검열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고재연 문화부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