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호이안 근교 짜꾸에 마을의 작은 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호이안 근교 짜꾸에 마을의 작은 강.
베트남의 복잡한 대도시만 다녀온다면 출퇴근 시간의 오토바이 행렬만 뇌리에 남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베트남의 전부는 아니다. 베트남의 진짜 모습은 소도시에서, 작은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버스, 기차의 안내방송에 나오는 낯선 지명에 귀를 쫑긋 세우고 용케 내리는 즐거움, 현지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기분 좋은 긴장감과 설렘이 그 길 위에 있다. 정해진 여행의 틀을 벗어나면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박한 일상을 숨겨둔 베트남의 소도시로 가보자.

바오록 - 차와 커피로 향긋한 도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베트남 짜꾸에 마을의 작은 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베트남 짜꾸에 마을의 작은 강.
베트남 남부지역의 유명 관광지 달랏(Da Lat)은 호찌민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 떨어져 있다. 해발 1600m의 고원 도시라 날씨가 시원해 더위에 지친 베트남 사람과 여행자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이다. 달랏으로 가는 길에 바오록(Bao Loc)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차(茶)로 유명하다고 들었지만 바오록에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발고도는 달랏보다 조금 낮은 1000m 정도다. 달랏만큼 서늘하진 않지만 호찌민의 더위를 식혀주기에는 충분했다. 차에서 본 상점과 호텔이 전부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대로를 벗어나니 아기자기한 동네가 펼쳐졌다. 어느 집 마당을 살짝 엿보니 커피콩을 널어 말린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차(茶)만 많은 곳인 줄 알았는데 바오록엔 커피도 흔했다. 향긋한 하얀색 커피 꽃과 빨간 커피 체리, 마당에서 말라가는 갈색의 커피콩, 싱그러운 차밭. 걷는 동안 눈과 코가 먼저 즐거웠다. 동네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산이 마주 보이는 근사한 카페도 있다. 대도시에서 마시는 커피도 즐겁지만 한적하게 산을 바라보고 마시는 바오록의 커피 한 잔도 참 좋았다.

바오록에는 남프엉(Nam Phuong)이라는 큰 호수가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제주도 올레길 몇 코스를 무난히 완주한 경험이 있으니 남프엉 호수도 문제없다고 자신했다. 시작은 가뿐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커피 꽃향기를 맡으며 걷는 길. 한참을 걷다가 만난 구멍가게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걸어도 걸어도 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체력은 고갈되고 어느덧 지나가는 이도, 가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 외딴곳에 이르렀다. 더위와 피로, 두려움에 결국 되돌아가기로 결정, 아까의 구멍가게까지 겨우 도착했다. 식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 식당도 아닌데 라면을 청했더니 주인인 프엉이 채소까지 듬뿍 넣어 끓여준다. 라면을 먹으면서 우리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택시를 불러주고 나중에 바오록에 또 오면 꼭 자기네 집에 들러 자고 가라는 프엉. 가다가 마시라며 택시 창문으로 큰 물병 하나를 넣어준다. 낯선 길이 맺어준 좋은 인연이 생겼으니 언젠가 또 한 번 바오록에 가게 될 것 같다.

짜꾸에 - 싱그러운 연둣빛 채소가 한가득

까오러우
까오러우
짜꾸에(Tra Que)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호이안(Hoi An)에서 북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이다. 호이안 여행자들은 보통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 끄어다이(Cua Dai) 해변에 다녀오는데 그 길에 이 마을이 있다. 호이안의 역사적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곳이다.

큰길에선 넓은 논만 보여 마을이 없나 싶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강이 흐르고 그 강을 따라 드문드문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순간 시야가 갑자기 트인다. 연두색 채소밭에 있는 꽃보다 더 예쁜 채소들이 눈을 맑고 시원하게 해준다. 오토바이, 자전거를 세워두고 여행자들은 천천히 채소밭 사잇길을 걷는다. 둔덕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일군 땅에 새싹들이 예쁘게 올라왔다. 연약하면서도 꿋꿋한 초록의 기운이 몸속으로 스미는 듯하다.

채소밭 주변의 식당 몇 곳에서는 요리수업을 열고 있다. 호이안의 대표 국수 까오러우(Cao Lau)와 싱싱하고 예쁜 채소를 넣어 만든 샐러드가 주 메뉴다. 호이안 구시가지의 복잡함에서 잠시 해방돼 연두와 초록을 보고, 싱싱한 채소로 만든 음식을 맛보는 싱그러운 시간. 호이안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 사랑스러운 마을을 놓치지 말자.

밧짱 - 마을 전체가 도자기 공방

투박하지만 예쁜 베트남의 도자기 그릇들을 뒤집어 보면 밧짱(Bat Trang)이라는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도자기 브랜드의 이름이자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밧’은 그릇, ‘짱’은 작업실을 뜻한다. 밧짱은 하노이 시내에서 16㎞ 정도의 거리라 가볍게 다녀오기 좋다. 7000동(약 350원)의 요금을 내고 버스를 타면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버스를 타고 밧짱에 내리자 도자기를 파는 상점들이 보였다. 욕심 나는 그릇으로 가득하지만 무게가 부담스러워 작은 그릇 몇 개만 사고 말았다. 밧짱은 그릇 외에도 마을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다. 작은 사원, 작은 시장, 하노이 구시가지보다 좁은 골목길이 마치 큰 도시를 축소해놓은 듯하다. 그리 넓지 않으니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헤매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마을 뒤쪽으로 걸어가면 강이 나온다. 강가에선 빚은 그릇을 말리느라 줄 맞춰 널어놓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작은 목욕탕 의자를 쭉 놓아둔 가게도 많은데 그릇에 색칠하는 곳이다. 밧짱의 여기저기를 구경하다 작은 카페를 만났다. 계란 커피라고 쓰여 있기에 궁금해 주문했다. 계란 노른자로 고운 거품을 내 커피 위에 얹어주는 독특한 음료다. 그런데 주인아저씨는 거품기 대신 공업용 드릴을 사용해 노른자를 풀었다. 드릴로 만든 커피라니. 밧짱에는 이렇게 예쁜 그릇과 재미있는 커피 그리고 소박한 즐거움이 있다.
 짜이맛 기찻길 카페에는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나이 든 손님이 가득하다.
짜이맛 기찻길 카페에는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나이 든 손님이 가득하다.
짜이맛 - 오후 4시 무렵의 매직 아워

달랏 시내에서 8㎞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 짜이맛(Trai Mat). 이곳으로 가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오토바이를 빌려 채소를 키우는 농가의 모습을 구경하면서 가거나, 택시를 타고 창문을 활짝 열고 소나무 향을 맡으며 가도 근사하다. 달랏의 옛 기차역에서 작은 기차를 타는 낭만적인 방법도 있다.

베트남식 쌀종이
베트남식 쌀종이
개인적으로는 오후 4시 무렵의 짜이맛을 좋아한다. 이 무렵이야말로 짜이맛의 매력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난 아이들은 두셋씩 짝지어 하교하거나, 데리러 온 엄마 아빠의 오토바이 뒤에 타느라 분주하다. 기찻길과 1m 정도 떨어졌을까 말까 한, 기찻길 코앞에 있는 동네 카페에는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나이 든 손님이 가득하다. 역 앞에서 저녁 찬거리를 파는 할머니들은 갖고 나온 채소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손님을 기다린다.
잠시 후 기차 도착 시간. 경적 소리가 멀리서 들리자 역무원은 건널목 차단기를 내린다. 기차가 역으로 천천히 들어오면 아이들을 태운 오토바이가 잠시 차단기 앞에 멈추고, 카페에 있는 사람들은 잠시 대화를 중단하고 기차를 바라본다. 그 짧은 시간, 세상이 일시 정지했다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순간을 보는 즐거움이 오후 4시의 짜이맛에 있다.

짜이맛 역 근처에는 깨진 그릇과 유리를 붙여 만든 링프억(Linh Phuoc)이라는 독특한 절도 있다. 절 안에는 소원을 이뤄준다는 커다란 종이 있다. 소원을 써 붙이고 종을 치려는 사람들로 주변이 늘 붐빈다. 소원 종이를 받고 한참을 고민하다 글을 적었다. 기차역 주변에서 만난 사람들, 이곳에 온 여행자들, 그리고 내 마음에 조금 전의 마법 같은 평온한 시간이 이따금 찾아오게 해달라고.

짱방 - 밤이슬 맞은 쌀종이가 이곳에

호찌민 시내에 있는 식당 중 ‘반짱 짱방’이라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다. 각종 향채와 망고, 구아바 잎 등 열 가지가 넘는 채소에 돼지고기 수육을 얹어 반짱에 싸먹는 집이다. 반짱은 베트남 어디를 가나 보게 되는 베트남식 쌀종이(라이스페이퍼)다. 그 뒤에 붙은 짱방(Trang Bang)이란 이름이 낯설었다. 알고 보니 호찌민에서 북서쪽으로 50㎞쯤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짱방 지방의 쌀종이는 흔히 보듯 바싹 마른 것이 아니라 조금 두툼하고 촉촉한 편이다. 그 특별한 쌀종이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고 싶어 짱방 마을로 향했다.

뭔가 떠들썩한 분위기일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마을은 고요하다. 현지 사람들은 조용히 라이스페이퍼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우선 냄비 위에 얇은 천을 씌우고 쌀 반죽을 붓는다. 뜨거운 김에 순식간에 익히고 대나무 발에서 말린 뒤 살짝 굽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구운 쌀종이에 밤이슬이 맞아야 비로소 완성된다. 이슬 때문에 짱방의 쌀종이가 그렇게 부드럽고 촉촉했던 것이다.

방문 시간에 따라 쌀종이를 만드는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오전 이른 시간에 가면 쌀종이를 부치고 찌고 발에 널어 말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뜨거운 햇볕에 쌀종이가 말라 ‘탁탁’ 하고 내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오후에 가면 오전에 말린 쌀종이를 굽는 풍경이 펼쳐진다. 집 마당에 동그랗게 생긴 화로를 놓고 쌀종이를 빠르게 구워내는 사람들의 손길이 신기해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엷은 베이지색의 쌀종이를 구우면 구름처럼 하얗게 부풀어 오른다. 다 구워진 쌀종이가 한편에 쌓이면 거대한 구름이 내려와 앉은 듯하다. 이렇게 구운 쌀종이는 밤새 이슬을 맞는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이곳에 들러 숙박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년 4월 초에는 쌀종이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진유정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 저자 nau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