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록과 원숙미…70~90대 화가들 '색채홀릭'
“붙이고 뜯어내는 반복적인 방식으로 평생 묵언수행 같은 작업을 했습니다. 어떤 날은 새벽까지 작업했고요. 그림은 매 순간을 선택해야 하는 고뇌의 산물이지만 ‘영원한 현역’으로 남는 게 제 미술 인생의 목표입니다.”(정상화 화백)

“정치적, 경제적 과도기를 거치면서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어요. 창작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죽는 날까지 행복한 그림을 그릴 겁니다.”(이왈종 화백)
오는 9월30일까지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전광영 화백.
오는 9월30일까지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전광영 화백.
정 화백과 이 화백을 비롯한 전광영, 이숙자, 김봉태 화백 등 70~90대 원로 미술가 10여명이 저마다 독특한 ‘손맛’이 깃든 신작을 쏟아내며 국내외 화단을 달구고 있다. 올 들어 미술관과 화랑이 국제 미술시장의 침체 여파로 실험성이 강한 젊은 작가보다 작품성을 검증받은 원로 화가의 전시회를 기획한 결과다.

전쟁과 해방, 독재와 민주화, 아날로그와 디지털시대를 겪으며 한국 현대미술사의 중심에 서 있는 이들은 선과 색채로 굴곡진 삶을 이야기하거나 자신의 지나온 삶과 경험을 떠올리며 아련한 향수를 풀어내기도 한다.

◆뉴욕 달구는 정상화 화백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 화백(86)은 지난 2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명 화랑 도미니크 레비 갤러리와 그린나프탈리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시작했다. 1970년대 초기 작품부터 근작까지 정 화백의 화업 60년을 압축해 보여준다. 미술시장에서 단색화에 대한 관심을 넘어 작가의 예술 인생을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맨주먹으로 미국과 유럽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전광영 화백(72)은 오는 9월30일까지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회고전을 펼친다. 3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에는 삼각형 크기의 스티로폼을 고서(古書) 한지로 싼 뒤 이를 캔버스에 일일이 붙인 30여점을 출품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지난달 30일 전시장을 ‘깜짝’ 방문해 화제가 됐다.

한국 추상회화 1세대 작가 김봉태 화백(78)과 ‘보리밭 작가’ 이숙자 화백(74)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나란히 회고전을 펼치고 있다. 미술협회 창립 멤버로 활동한 김 화백은 1960년대 초반 제작한 추상화부터 기하학적 형태의 색면 작품까지 대표작 100여점을, 이 화백은 백두산 그림을 비롯해 ‘보리밭’ ‘한글’ ‘소’와 대학시절 누드 드로잉까지 100여점을 내걸었다.

원로 작가를 유치하기 위한 화랑의 경쟁도 치열하다. 갤러리 현대는 정상화를 비롯해 이우환(80), 윤명로(80), 박서보(85), 김기린(80) 등 원로 작가 여섯 명을 초대한 ‘애프터드로잉’전을 기획했다. 현대화랑은 현대판 풍속화의 거장 이왈종 화백(71)의 개인전을 열어 관람객 1만여명을 끌어모았다. 선화랑은 긁는 작업으로 모노크롬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이정지 화백(74), 청작화랑은 탄탄한 구상 실력을 갖춘 김경자 화백(70)의 초대전을 열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갤러리 작은 다음달 18일까지 ‘오로라 작가’로 잘 알려진 전명자 화백의 초대전을 열고, 아트사이드는 백영수 화백(94)의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컬렉터들 관심 집중

미술 경기가 침체한 상황에서는 미술 애호가의 관심이 젊은 작가보다 어느 정도 작품성이 검증된 작가에게 쏠리기 마련이다. 원로 작가들의 전시회가 늘어나는 요인이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관록과 원숙미를 자랑하는 원로 작가들은 얄팍한 추세에 의지하기보다 끊임없는 도전 정신과 자기성찰, 혁신적 시도에 독창성까지 가미된 작품을 통해 그동안 치열하게 탐구한 성과를 내보이고 있다”며 “미술시장이 조정기를 거치면서 일부 수요층이 가격은 비교적 비싸지만 작품성이 탄탄한 원로작가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원로 작가들은 글로벌 시대에 맞는 작품보다는 다분히 한국적인 정서에 호소한 작업에 매달리고 있어 극히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해외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계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