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훈동에 있는 노화랑이 20일부터 여는 ‘한국 근·현대미술 11인전’에 출품한 김환기 화백의 1973년작 점화 ‘2-Ⅴ-73 n.313’.
서울 관훈동에 있는 노화랑이 20일부터 여는 ‘한국 근·현대미술 11인전’에 출품한 김환기 화백의 1973년작 점화 ‘2-Ⅴ-73 n.313’.
지난 4월 홍콩 경매에서 48억6000만원에 낙찰돼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경신한 1970년작 ‘무제’를 그린 사람은 한국 미술시장의 대표작가 김환기 화백(1913~1974)이다. 김 화백은 1963년 10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받은 뒤 곧바로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홍익대 미술대학장과 한국미술협회 회장직을 내놓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다시 그림을 시작한다는 각오를 다진 그는 작고하기까지 뉴욕에서 매일 16시간 이상 작업에 몰두했다. 뉴욕 하늘을 바라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대형 화면에 수십만개의 점으로 응축한 작품들은 1970년대 ‘단색화 시대’를 여는 이정표가 됐다.

김 화백의 뉴욕 시절 점화를 비롯해 박수근 이중섭 도상봉 오지호 윤형근 정상화 이우환 박서보 하종현 김태호 등 국내 근·현대미술 거장의 걸작 17점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서울 관훈동 노화랑이 20~31일 펼치는 ‘명품의 향기를 찾아서-한국 근·현대미술 11인전’이다. 출품작의 보험가액만 80억~100억원에 달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근·현대미술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에는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작가마다 창의적 도전을 시도한 작품부터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든 1980~2000년대 작품을 소개한다. 한국 근·현대사와 영욕을 함께하며 예술정신을 아로새긴 대가들의 ‘회화 정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박수근 화백의 ‘여인’.
박수근 화백의 ‘여인’.
출품작들은 제작 기법이 서로 다른 단색화부터 풍경화, 정물화까지 한국 미술의 프리즘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박수근 화백의 1960년대작 작품 ‘여인’은 어렵고 힘든 시대를 묵묵히 살아간 한국 여성의 꿈과 의지를 진실하게 그려낸 명작으로 꼽힌다. 노상에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여인을 황토색 미감으로 잡아낸 게 이채롭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중섭 화백의 풍경화도 모습을 드러낸다. 1950년대 서울 정릉의 한적한 마을 풍경을 연필이나 철필 끝으로 눌러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수채나 유채를 칠한 작품이다. 색채는 다소 어두운 편이지만 대가의 단아하고 깊은 미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라일락꽃 작가’로 잘 알려진 도상봉 화백이 활짝 핀 라일락꽃을 중심으로 경복궁 향원정의 고매한 모습을 잡아낸 작품도 관람객을 반긴다. 평범한 풍광을 그저 사실적으로 그린 게 아니라 운치와 정취를 더해 서정적·심미적으로 접근한 도 화백의 조형론을 실감할 수 있다. ‘한국 인상주의 거장’ 오지호 화백의 1972년대 작 ‘함부르크항’과 ‘해경’은 다양한 색감보다는 붓 터치의 속도 조절을 통해 넘실대는 파도, 정적인 원경의 고즈넉함을 한 화면 속에 녹여냈다.

내로라하는 국내 단색화가들의 작품도 모두 모였다. 자연의 에너지를 붓끝으로 잡아낸 이우환의 ‘바람’,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개념을 절제된 추상으로 구현한 정상화의 작품, 붓끝으로 감정 변화를 읽어낸 하종현의 ‘접합’, 암갈색과 군청색 등 비교적 한정된 색조로 자연의 섭리를 묘사한 윤형근의 작품 등에서는 한국 고유의 단색 미학을 엿볼 수 있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미술 애호가들에게 대가들의 작품을 한 점 한 점 빌려 모아 마련한 전시”라며 “한국 근·현대미술의 트렌드와 위상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02)732-355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