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가 강익중 씨(55)는 미국에 건너간 지 10년째던 1994년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 선생과 2인전을 열 기회를 잡았다. 선생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선생은 “난 괜찮으니 강익중에게 더 좋은 공간을 주라”며 후배 예술가를 배려했다고 한다. 강씨를 비롯한 ‘백남준의 후예’들이 국내외 시장 개척에 본격 나서고 있다. ‘제2의 백남준’을 꿈꾸며 국내외 화단에서 활동하는 미디어·영상·설치 작가는 김수자 이불 양혜규 김소라 이이남 이용백 구정아 서도호 정연두 박찬경 임흥순 김해민 이예승 씨 등 300여명에 이른다.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은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혁신적 시도에 독창성까지 가미한 영상·설치 작품,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뉴욕·중동·파리로…'백남준의 후예' 300여명이 뛴다
◆미국·중동·유럽으로 ‘훨훨’

김수자 양혜규 이이남 정연두 씨 등은 과학과 예술을 결합한 뉴미디어아트 장르를 선도하며 세계적인 작가들과 경쟁하고 있다. 영상 설치작가 정연두 씨(48)는 베트남 난민 이야기를 영상으로 시각화한 신작 ‘여기와 저기’ 시리즈로 프랑스 시장을 정조준한다. 오는 29일까지 프랑스 파리 맥발(MAC/VAL)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정씨는 소외된 사람들의 애절한 아야기를 융합한 영상작품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작년 베이징 울렌스미술관 개인전으로 중국 시장을 ‘노크’한 양혜규 씨(45)는 다음달 4일부터 한 달간 뉴욕 그린나프탈리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유리, 알루미늄 블라인드, 적외선 히터, 환풍기, 선풍기, 짚 등 평범한 오브제로 영상 및 조각을 아우른 설치작업을 내보인다.
미술가 양혜규 씨가 작년 10월 중국 베이징 울렌스현대미술관에서 연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
미술가 양혜규 씨가 작년 10월 중국 베이징 울렌스현대미술관에서 연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
카타르아트센터 초대전으로 중동시장에 안착한 이이남 씨(47)는 다음달 22일부터 두 달간 두바이 부르즈칼리파 아르마니호텔에서 개인전을 열고 첨단 미디어아트의 정수를 보여줄 계획이다. 이어 오는 5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리는 ‘리트베르크 뮤지엄-세계의 정원’전에 참여해 담양 소쇄원을 주제로 한 신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보따리 작가’로 유명한 김수자 씨(58)도 유럽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해 말 스웨덴과 스페인에 진출한 데 이어 다음달 19일까지 열리는 스위스 추오츠 추디갤러리의 기획전에 설치작품 ‘보따리-트럭’을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밖에 김소라 씨는 중국 광저우트리엔날레에 참여하고 있고, 영상및 설치작가 이수경 씨는 오는 10월 싱가포르 오타파인아츠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국내에서도 인기 작가 전시 줄이어

뉴욕·중동·파리로…'백남준의 후예' 300여명이 뛴다
국내 화단에서도 인기 작가들의 전시가 줄을 잇고 있다. 미술관과 화랑들의 유치 경쟁도 치열하다. 독특한 영상설치 작품들로 주목받아 온 김해민 씨(59)는 다음달 2일부터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뮤지엄에서 초대전 ‘쾅!’을 진행한다. 디지털 미디어 기술과 회화적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으로 유명한 이예승 씨(42)는 다음달 3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신작 10여점을 내보인다.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한 전준호 문경원 씨는 4월17일까지 이어지는 부산시립미술관 기획전 ‘스테이징 필름’전에 공동 영상작업 ‘세상의 저편’을 출품했다. 최우람(10월·대구미술관) 이용백(8월·학고재갤러리) 구정아(9월·갤러리 현대) 육태진 박화영 김승영 김세진 한계륜 김창겸 구자영 유지숙 류비호 김태은 장지아 노재운 씨 등도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강익중 씨는 1998년부터 준비해 온 250m 규모의 세계 최대 설치작품 ‘임진강 꿈의 다리’에 온 힘을 쏟을 계획이다.

◆공공미술로 떠오른 미디어아트

최근 미디어아트 및 영상·설치미술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 전위미술에 비해 친근감을 주면서도 공적인 기능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양만기 씨가 2009년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 외벽에 설치한 세계 최대 디지털 캔버스는 공공미술로서 미디어아트의 역할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다. 설치작가 정현을 비롯해 천광대 노해율 씨 등이 참여한 인천 ‘송도 아트시티’ 프로젝트도 첨단기술을 접목한 설치미술의 차별화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 영화와 방송 등의 특수효과로 사용되는 컴퓨터그래픽이나 게임은 미디어아트에서 자생한 대표적인 ‘상업미술’로 꼽힌다.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과학과 예술을 결합한 예술이 국제시장에서 주목받으면서 새로운 공공미술 장르로 급속히 떠오르고 있다”며 “독특한 아이디어의 영상·설치 작품은 앞으로 미술품 수출의 주역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우환·이왈종…설치작업 병행하는 화가도 급증

미술 장르 융합의 진원지는 평면회화 분야다. 회화가 미술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회화가 디지털시대를 맞아 다른 장르에 자양분을 제공하던 ‘소스(source)’에 머물지 않고 장르 간 교류와 소통의 ‘창구’로 역할이 바뀌는 추세다.

국내 화단에선 이우환 이왈종 이강소 이희돈 씨 등이 장르 간 경계를 허물며 활동하고 있다. 단색화가 이우환 화백은 철판과 돌을 활용한 설치작품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왈종 이강소 임옥상 강형구 화백도 그림과 설치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한국화를 전공한 김덕용 씨(55)는 1995년부터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는 회화 작업을 해왔지만 최근에는 목조각, 설치 작업도 함께 시도하고 있다. 이기봉 박성태 서도호 이이남 씨는 동양화의 정신적 철학을 조형 작품에 표현하고 있다.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