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프린트가 그려진 이불과 쿠션에 기댄 채, 핀에어의 비즈니스석을 타고 가서 그랬는지 몰라도 여행은 한결 가볍고 첫날부터 에너지가 돌았다. 도시는 상쾌한 초록색으로 넘쳤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꽃처럼 밝고 화사했다. 해는 밤 11시가 지나야 졌다. 이미 백야가 시작된 것이다. 헬싱키에서 만난 마리메코의 한 디자이너도 매일 보는 도시 사람들이 신기한 듯 말했다.

“겨울이면 핀란드의 도시는 흑백이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죠. 그러다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정이 달라져요.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서 다 튀어나온 거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활기찬 사람들이 거리를 쏘다닙니다.”
 양귀비(우니코) 무늬로 꾸민  패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마리메코 매장.
양귀비(우니코) 무늬로 꾸민 패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마리메코 매장.
연과 계절에서 영감받는 핀란드 디자인

핀란드의 디자인이 북유럽을 대표하는 위치에 설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극단적인 계절의 변화와 풍부한 자연 환경도 중요한 몫을 했다. 밤이 길고 추운 겨울에 핀란드 사람들은 집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니 집 안에 있는 가구나 인테리어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핀란드의 가구들이 편하면서도 실용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이 나라 사람들이 항상 오랫동안 쓰는 것, 보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친근한 나무나 돌과 같은 자연에서 재료를 구했고, 가구의 형태가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반면, 좀 지루하고 단조롭다 싶으면 밝은 직물과 패턴을 사용해 변화를 주었다. 모든 것은 실용적이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스타일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좋은 품질을 고집했고, 인체 공학적 디자인을 고려했으며, 절대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지속성을 중시했다.

그렇게 해서 핀란드의 많은 디자인 명품이 탄생했다. 핀란드의 국민 건축가 알바 알토가 자작나무를 휘어 만든 스툴 60 의자, 국민 브랜드 마리메코의 디자이너가 양귀비꽃에서 영감을 얻어 패턴으로 만든 우니코 라인, 깨끗한 물처럼 영롱한 느낌의 유리 공예 브랜드 이탈라 등이 그것이다. 이런 나라와 국민의 배경을 알고 나면 헬싱키에서 만나는 유명 브랜드의 특징과 디자인도 좀 더 자연스레 이해된다.

핀란드의 국민 브랜드 마리메코

마리메코의 양귀비(우니코) 라인 50주년 패션쇼 참가자들.
마리메코의 양귀비(우니코) 라인 50주년 패션쇼 참가자들.
올해는 마리메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우니코 라인이 생긴 지 50주년이다. 마리메코의 창시자는 자연 상태의 꽃보다 아름다운 패턴은 절대 나올 수 없다는 믿음 아래 원칙적으로 꽃을 형상화한 패턴은 절대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 지시를 따르지 않고 마야 이솔라라는 디자이너가 양귀비꽃을 이용해 만든 패턴이 우니코 라인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우니코 라인은 마리메코를 대표하는 패턴이 됐다. 많은 사람이 마리메코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다닌다. 패션뿐만이 아니라 그릇, 침구류, 주방용품 등 생활 전반에 걸친 다양한 제품이 두루 사랑받는다. 마리메코의 제품들은 색이 경쾌하고 화사해서 들판의 꽃을 보는 것처럼 사랑스럽다. 마리메코의 라인에는 어린이가 그린 것 같은 순수하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동물과 나무, 숲과 호수를 형상화한 패턴이 자주 등장한다. 옷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파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하는 마리메코의 철학이 제품에서도 잘 느껴진다.

에스플러네이드 공원 한가운데에서 시민을 위한 마리메코의 50주년 패션쇼가 열렸을 때 사람들은 돗자리를 깔고 샴페인을 마시면서, 혹은 꽃을 들고서 이 브랜드의 장수를 축하했다.

헬싱키의 디자인 디스트릭트 탐방

헬싱키에선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아도 어디서나 쉽게 디자인을 접할 수 있다. 디자인 디스트릭트로 지정된 지구만 가더라도 유명 디자인 숍과 브랜드가 동네 가게처럼 줄지어 서 있다. 아르텍(Artek), 마리메코, 이탈라(Littala), 펜틱(Pentik), 아에로(Aero) 디자인 퍼니처 정도의 이름을 기억해두자. 북유럽의 앤티크 제품과 수만 점에 이르는 컬렉션이 전시돼 있는 디자인 박물관과 헬싱키 디자인의 트렌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디자인 포럼도 필수 코스다. 디자인 디스트릭트로 지정된 숍의 문에는 둥근 스티커가 붙어 있다.

■헬싱키에서 가볼 만한 디자인 숍

 가구 브랜드 아르텍 내부.
가구 브랜드 아르텍 내부.
아르텍(artek.fi)

모더니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바 알토(Alvar Alto)가 창립한 브랜드. 나무를 주재료로 사용하고, 자유로운 곡선 형태의 가구를 주로 선보인다.

마리메코(marimekko.com)

디자인 디스트릭트에 두 군데 매장이 있다. 사람들의 일상이 밝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창조적인 방법을 패턴과 디자인으로 보여준다.

이탈라(littala.com)

단순하지만 완벽한 비례, 아름다운 곡선, 오래 가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1881년 유리 공장으로 시작한 이탈라는 카이 프랑크(Kaj Franck)와 알바 알토의 정신을 기리며 다양한 생활 디자인 제품을 만들고 있다.

디자인포럼(designforum.fi)

헬싱키의 디자인 트렌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젊은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고,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제품도 구입할 수 있다.

헬싱키 글·사진 =이동미 여행작가 ssummersu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