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수근의 작업실을 재현한 모습. 정석범 기자
화가 박수근의 작업실을 재현한 모습. 정석범 기자
매력적인 젊은 여인이 이젤 앞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그는 잠시 붓을 놓고 관객을 향해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다. 그림이 말해주지 않은 작가의 삶이 생생히 전해온다.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 자리한 더 페이지 갤러리에서는 이런 연극 같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9월28일까지 열리는 근현대 미술 체험 전시인 ‘노 모어 아트(No More Art)’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예술가의 삶과 시대 상황을 작가가 살았던 집, 아틀리에, 그들이 거닐었던 거리 등 공간의 재현을 통해 관객에게 생생한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노 모어 아트’는 과거 예술 형식이나 가치와의 작별을 의미한다.

근대미술 섹션에서는 이중섭, 박수근, 구본웅, 나혜석, 이인성 등 5명의 작가가 실제로 살았던 공간을 재현했다. 관객이 서울숲 역 개찰구를 통과해 전차에 오르면 과거를 회상하는 영상이 상영돼 1950년대 서울로 안내한다. 일종의 타임머신인 셈이다. 전차에서 내리면 국제시장 광장이 눈앞에 전개된다. 당시의 옷차림을 한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수가 행인을 향해 소리 높여 호객한다. 시인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다방은 손님들로 북적댄다.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상념에 잠긴 나혜석과 동네 어귀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박수근이 기다리고 있다. 그 오른쪽에는 이중섭이 제주 시절 일본인 부인, 두 아들과 살을 비비던 1평 남짓한 작은 방이 있고 길 맞은편 페이지 양장점에는 배우 김혜수가 유니세프를 통해 내놓은 복고 의상이 진열돼 있다.

양장점을 지나면 현대미술 섹션이 이어진다. 근대미술과 마찬가지로 작가별로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 “예술은 사기다”라고 외쳤던 백남준의 멀티비전을 감상할 수 있는 ‘플럭서스로의 초대’, 그려진 공간보다는 그려지지 않은 공간에 주목했던 샘 프랜시스의 ‘여백과 추상표현주의’의 방에서는 대가의 아우라가 전해진다.

또 종교보다 약을 맹신하는 현대인을 야유한 데미안 허스트의 ‘새로운 종교’, 팝아트 예술을 차용하고 재생산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 리처드 페티본의 ‘페티본의 위대한 그림 사용법’, 오래된 것과 낡은 오브제가 지닌 아우라를 독특한 관점으로 병합한 변종곤의 ‘오브제들의 변주’, 프랑스 기능주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거대한 건축의 집약체인 아트퍼니처’의 방도 관객을 기다린다. 어른 1만원, 학생 7000원. 성동구민에겐 40% 할인해준다. (02)3447-0049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