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앤디 워홀 "비즈니스는 최고의 예술"
“나는 상업미술가로 시작했고 예술사업가가 되고 싶다. 돈을 버는 것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팝아트’라는 장르로,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의 문을 대중에게 열어젖힌 앤디 워홀. 그는 예술가였을까, 사업가였을까.

워홀은 192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체코슬로바키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난에 시달렸던 어린 소년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1949년 카네기멜론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뉴욕에서 잡지 삽화를 그리고 광고를 만드는 등 ‘그림 장사’로 돈을 벌었다.

1956년 첫 전시회 후 몸값이 많이 올랐지만 그의 작품소재는 여전히 코카콜라 병, 달러 지폐 등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것들이었다. 이른바 팝아트,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싸구려 산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예술이 됐다.

1963년에는 아예 월급 화가들을 고용해 ‘그림 공장’을 차렸다. 이름도 ‘팩토리’로 지었다. 워홀은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마릴린 먼로, 캠벨수프 통조림 등 판화 작품을 쏟아냈다. 이즈음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영화 ‘잠’(1963), ‘엠파이어’(1964) 등 280여편을 찍었다.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보라. 뒷면엔 아무것도 없다”며 오직 작품을 통해서만 대중에 다가갔던 예술가, “일단 유명해져라. 유명해지기만 하면 당신이 똥을 싸더라도 사람들은 박수를 칠 것”이라며 평생 부와 명성을 추구했던 사업가.

워홀은 1987년 담낭 수술이 잘못돼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59세, 27년 전 오늘이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