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콩고의 처녀들-킨샤사에서’ 갤러리현대 제공
천경자 ‘콩고의 처녀들-킨샤사에서’ 갤러리현대 제공
우리가 전시장에서 만나는 작품은 대부분 작가의 최종 작품이다. 이는 완성도는 높지만 때때로 보는 이에게 허전함을 남긴다. 남다른 열정과 기행으로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의 작품이 의외로 차분한 느낌을 주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치열한 예술혼을 확인하는 방법은 없을까.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내달 5일부터 3월9일까지 열리는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 전은 작가가 한 점의 작품을 쏟아내기 위해 쏟아부은 열정과 고뇌를 여과 없이 볼 수 있는 자리다.

김환기 ‘새와 달’
김환기 ‘새와 달’
현대 작가에게 종이 작업은 한 시대를 증언하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6·25전쟁과 이후의 생활고 속에서 작가들이 유일하게 작업할 수 있었던 수단은 붓과 연필뿐이었기 때문이다. 단 한 점의 유화도 남기지 못한 국민화가 이중섭과 미국인 작품 구매자에게 그림값 대신 물감을 보내달라던 일화를 남긴 박수근은 그런 시대의 아픔을 되새기게 한다.

이번 전시에는 근현대를 대표하는 국내 작가 30명의 작업이 총망라됐다. 1부에서는 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권진규 이응노 최욱경 천경자 김종학 등의 구상 작업을 선보인다. 예술혼을 불사를 대상이 종이밖에 없었던 이중섭의 작품들은 스케치라는 단순한 기초작업이 아니라 종이와 연필에 의한 완성작과 다름없다.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와 새와 게’는 경쾌하고 과감한 선의 맛을 보여주며, ‘세 사람’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예술적 완성도를 높였다.

유화 작가로 널리 알려진 이인성의 ‘부인상’과 ‘풍경’은 유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맑고 투명한 분위기가 드러나 작가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해준다.

2부에서는 김환기 이응노 남관 김창렬 서세옥 박서보 이우환 한묵 함섭 신성희 등 추상적이면서도 종이라는 매체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한자의 형상을 한지 위에 콜라주하듯 배열해 동양적인 감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낸 이응노의 문자추상, 김환기가 말년에 종이 위에 그린 점 시리즈, 푸른 수채물감으로 한자의 획이 요동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이우환의 추상작품이 관객을 맞이한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진가를 인정받고 있는 함섭의 작품은 물에 적신 한지를 방망이로 두드리고 염색해 한지가 갖고 있던 담백한 맛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그간 우리 미술계는 너무 유화 작업에만 주목하고 종이 작업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왔다”며 “이번 전시가 예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02)2287-3515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