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이 휘황찬란한 공간이라고만 생각하면 즐거움을 찾기 힘들어요. 6000원짜리를 사도 행복을 느끼고 당당해야죠.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요령이 생긴 40대이기에 쓸 수 있었던 책입니다. "

소설가 조경란 씨(42)가 산문집 《백화점-그리고 사물 · 세계 · 사람》(톨 펴냄)을 내놨다. 16년 작가생활 중 가장 즐겁게 쓴 책이란다. 변변한 '명품' 하나 구입해 본 적이 없는 저자는 백화점을 좋아한다. 서울 봉천동 집과 인근의 작업실,도서관을 제외하면 그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시장과 백화점을 찾는 것이다. 그는 "특히 도서관에 갔다가 백화점에 들렀다 오는 날이면 기분이 나아지곤 했는데 '왜 그럴까' 고민했다"며 "무엇보다 '쇼핑을 좋아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생각이 없거나 혹은 가볍거나 속물적이라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더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책은 구성과 내용이 독특하다. 총 11장으로 이뤄졌는데 대개 시계와 향수 등이 입점한 '1F(1층)',여성복으로 가득한 '2F' 등 백화점의 10층과 지하 1층을 각 장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시계에 대한 취향''구두 파는 남자''청바지와 정체성' 등 흥미로운 짧은 글 4~6개로 각 장을 구성했다.

내용도 독자들의 예상을 비껴간다. 현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꽃'인 백화점에 대해 그 병폐나 불합리함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백화점이란 공간이 내포하고 있는 미학,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삶과 욕망,소박한 기쁨들에 대해 분석하고 예찬한다.

파리 봉마르셰 백화점이나 일본의 미스코시 · 이세탄 백화점,우리나라 백화점의 역사를 비롯해 매장의 배치와 고객의 동선,조명과 음악 기획 등 산업적인 측면까지 들여다봤다. 물품보관소와 구두수선실,폐점 이후 매장 풍경 등 백화점의 뒷 얼굴도 조명했다.

작가의 경험담과 가족 이야기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사회의 낙오자로 생각하던 '조뚱'이라 불리던 시절,미도파 백화점의 쇼윈도를 보며 자신의 꿈을 떠올렸던 일이나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한 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출판사와 급한 계약을 해놓고선 백화점에서 '과분한' 가방을 샀던 기억,짙은 머스크향과 검은 색 옷들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려 했던 젊은 시절,두 여동생의 결혼식 날 당당하게 빨간 색 원피스를 골라 입었던 일화 등 백화점이나 쇼핑과 얽혀 있는 이야기들은 솔직하고 담백하다.

작가가 좋아하는 해외 작품들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향수 매장에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코'를 떠올리고 구두 매장에서는 17세 첩의 발에 매혹당한 노인의 페티시즘을 그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후미코의 발'을 소개하는 식이다.

이 책에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여러 욕망과 심리 상황이 잘 드러난 것이 특징이다.

"명품 매장의 문턱을 들어서는 순간,유니폼을 차려 입고 흰 면장갑을 낀 매장 직원들은 곧바로 우리가 자신들의 상품을 살 수 있는 고객인지 아닌지 알아차리는 것 같아요. 분명히 어떤 '구분'이 존재하죠.불편함을 느낄 때도 많고요. 그래도 마흔이 넘어가니까 의식하지 않고 뚜벅뚜벅 들어가서 구경하게 되더라고요. "

그는 대형 서점에서 책을 팔던 시절에 대해 '내 판단에 책 같지도 않은 책을 찾거나 사 가는 손님들은 무시했다. 손님이 찾는 책은 귓등으로 듣고 내가 책들을 권하는 때도 많았다'고 고백하며 명품 매장에서의 경험과 비교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주는 미덕은 각 개인의 취향에 대한 예찬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패션을 주의 깊게 보지만 '뭐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판단하진 않는다"며 "모든 사람에게는 나름의 기호와 취향이 있고,나는 마치 낯선 책을 만난 것처럼 그 의미는 뭘까 생각해본다"고 말한다.

"쇼핑은 어떤 식으로든 새로움이고 즐거움이죠.다만 욕망이란 갖고 있을 때도 뜨겁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때는 더 뜨겁고 강렬한 힘을 필요로 해요. 사물들 앞에서 전 종종 질문합니다. 지금 이것을 산다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